The end of the world
'둘 다 행운이야'라고 말한 건데, 젊은 연인은 아직 둘로서 행운을 얻기보다 학교에서 성적으로 경쟁하는 게 익숙했듯 서로의 자존심이 더 중요했었다. K는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임상실험 중이던 백신이 좀 더 빨리 배포가 되었더라면 그녀는 살아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누굴 말하지? 전생애에서 결혼만 해도 100번 넘게 하지 않았나?"
나는 한가닥 내려온 머리카락을 성가신 듯 쓸어올리고 있는 456413678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알면서 잘도 묻는군. 그나저나 그 부서는 한가하기 짝이 없나봐. 참 뻔질나게 드나드는군."
"그거야.."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무슨?"
"떠날 때가 되었으니깐."
"아, 그거."
나는 한시도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으면서도, 일부러 센 척을 했다. 456413678은 이미 간파하고 있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걱정스러운 그의 표정이 꼴보기 싫었기 때문인지, 나는 등을 돌려서 누웠다.
"그만 가게."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해서 456413678가 떠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등에 꽂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도 항상 K를 닮은 사람을 찾고 있는 것 같아."
갑작스레 어떤 기억이 선명해졌다. 몇 년 전 후배와 통화를 했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나 역서 본능적으로 그녀와 닮은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이었다. 말을 꺼내놓고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도 없어서 우물쭈물했었다. 왜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 닮은 사람인가.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런데, 이번 생은 만족했는가.”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랐는데, 456413678이 모두 망쳐버렸다. 짜증스러운 마음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456413678은 옆에 서서 조롱하듯 내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돌아봤다. 그 미간의 주름, 성형이라도 권하고 싶은 그 미간의 주름이 유난히 짜증을 돋웠다. 차곡차곡 나열된 성냥갑 같은 침대에 누운 탓인지 성냥갑 속의 성냥개비가 된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불에 타면 색을 잃고 검게 변하는 성냥개비는 456413678의 담배에 불씨가 옮겨붙고 있었다. 연탄에 불을 지피듯 숨을 불어넣으면 불씨가 더 강렬하게 점점이 불타올랐다.
"그래서 이번 생은 만족을 했냐고 묻지 않는가."
그는 비아냥거렸다. 걱정과 비아냥을 섞을 수 있다면, 딱 그런 말투일 것 같았다. 병실에는 방향제를 소독약 향기로 쓰는 게 분명해 보였다. 소독약 냄새에 속이 메스꺼웠다. 잠시 후 모처럼 한그릇을 비운 점심히 고스란히 게워져 나왔다. 그 생에서 나는 병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정신이 보다 깊게 병들어 있었다. 두 번의 결혼 실패 후에 병을 발견했고,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첫 번째 아내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 문제로 남편인 나보다도 시어머니와의 의견 충돌이 극심했었다. 두 번의 이혼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다시 말해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철저히 모든 것에서부터 단절되어 오로지 홀로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을 연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철저한 혼자. 내가 죽어가는 것을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식이 없다는 점뿐이었다.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말라 죽어가는 부모의 모습이 자식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어떤 희망감을 줄 수 있겠는가. 매달릴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다면 1분 1초조차 숨 쉬며 살아가는 걸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희망을 잃었다고 여겼을 때 숨을 쉬지 못하고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장기는 꽤 점진적으로 파괴되었다. 증상을 느낀 지 1년이 넘은 상태에서 병마는 장기 곳곳에 퍼져 있었다. 밥 먹듯이 이직을 해 온 생애와 상관은 없겠지만, 병마는 도처를 떠돌며 전이되었다. 창밖에는 나이팅게일이 어제보다 맑은 음색으로 재재거렸다. 저 새야말로 나의 유일한 병문안객이었다. 아, 한 사람이 더 있던가. 456413678.
“자네도 참. 간부에 지원하지 않고 이게 무슨 꼴이람.”
그는 이제 거들먹거리기까지 했다. 수건으로 양치한 입가를 힘없이 닦으며 그에게 가래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침을 삼키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뿐이었다.
“간부는 체질에 맞질 않는다니까.”
나는 이제는 촉새처럼 시끄럽게 구는 456413678이 곧장 떠나주기를 바라며, 잠의 축복 속에 빠져들길 기원했다. 하루를 버틸 수 있는 건 잠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더 깊은 잠인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을 법한데 매번 매번 사형수의 기분으로 죽음의 공포를 직면해야 했다. 죄를 지은 게 없는데도 죄인의 기분으로.
해질 녘에 나이팅게일이 마지막 노래를 들려주고 날아갔다. 새의 날갯짓에서 연약한 온기를 담은 생명의 파동이 울려퍼졌다. 저토록 연약한 생명체가 뿜어내는 생명력에 잠시 경탄을 하면서, 그제야 456413678이 이미 자리를 뜨고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대로 잠이 들길 간절하게 바랐지만 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군대처럼 간호사와 의사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팅게일과 군대는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가.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가길 바랐던 하루는 진통제 용량을 늘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 진통제가 몇 cc까지 늘어났을 때 나는 죽게 될까. 간호사가 신중하게 투여하는 실루엣을 바라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죽을 때 내 몸에 축적된 진통제는 몇 cc나 될까. 통증을 견뎌보려고 뒤척이며 자세를 바꾸고, 모로 눕거나 무릎을 웅크리거나 내 몸을 꼬집는 동작을 반복하다가 진통제 기운이 서서히 온몸에 퍼질 때 진통제가 든 팩의 붉은 눈금을 바라보다가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잠의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