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는 울지 않는다 7화

옹이

by 호림


붓끝이 떨리고 있었다. 터치가 굉장히 정확해서 그것을 계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점도, 한 원도 틀리게 그리지 않으려는 과욕이 앞섰기 때문인지 손이 계속 떨렸다.


“단지 포기했던 거 아닌가요?”


사투리를 애써서 감추고 있는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향이라면, 잔향처럼 은은하게 남은 사투리였다. 캔버스 위로 붓을 뭉그러뜨려버릴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가자 소나무의 몸통에 계획에 없던 옹이가 단숨에 툭 불거졌다. 붓을 내려놓고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본다. 옹이는 마치 덧난 흉터처럼 보였다. 그림 속 나무에 솟은 옹이는 그게 눈 깜빡할 찰나의 실수란 걸 누구도 모를 만큼 사소했다. 붓놀림은 그만 정지하고 말았지만 이상하리만치 옹이는 좀 전보다 커진 것 같았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얼굴 근육이 긴장했다. 이성적인 사고가 한 치의 실수를 용납하기도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말해보건대 누군가는 그 실수를 눈치채주어도 좋지 싶다. 여기 봐, 여기 옹이가 있어. 이 사람의 가슴에 옹이가 있어. 나는 꾸중들은 아이처럼 시르죽하게 붓을 팔레트에 털었다. 집중하자. 붓을 펴 넓게 그린 대추나무 가지에 빨간 대추 열매를 매달았다. 한 알 한 알 먹음직해 보이도록 리퀴드화이트를 점점이 찍어 넣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그것은 대추나무 뿐 아니라, 앵두나무도 되고, 구기자나무의 붉게 익은 열매가 되기도 할 터다. 잘 영근 붉은 열매란 입맛을 돋구는 색을 발하고 있었다. 화폭의 왼편에서 옹이가 자리잡은 나무까지 적어도 너댓 그루의 나무는 넘었다. 문득 옹이를 덮어버리고 싶었다. 눈엣가시처럼 두드러져 보였다. 그것은 화실 밖에서 진한 에스프레소를 타오는 과정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주의를 흐트려뜨렸다. 화장실을 갈 때도, 결재사안을 검토할 때도, 본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가 캔버스 앞에 앉았을 때도 매번 반복으로 이어졌다. 심지어는 몸에 두드러기가 오르는 느낌마저 들었다. 에스프레소를 담은 종이컵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촉감을 그대로 화폭으로 옮기면 옹이는 저절로 녹아 뿌리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종이컵 뚜껑에 작게 난 구멍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실큼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것을 한 겹 덧칠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망설여졌다. 그때 화폭 위 호숫가에 앉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불그스름하게 촛불처럼 일렁이는 옷을 입은 여인은 그가 옹이를 지우지 못하는 게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얕은 호수에서 참방참방 뛰노는 세살배기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붓이 서너번 캔버스로 다가갔지만 결국은 손을 거두었다. 옹이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림 속의 여성이 나를 응시했다. 시선을 눈치채고 마주보았을 때 그 시선은 공교롭게도 화실 문 바로 앞에 있었다. 반 쯤 헐벗은 여체의 부드러운 선이 머릿속에 남아있을 때였다. 붓을 들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동요하는가 싶더니 마치 흔해빠진 물건을 바라보는듯 얼른 낯빛을 바꾸었다. 머리에는 고상한 큐빅장식의 미니 티아라가 있었고, 긴 생머리는 허리까지 닿았다. 수수한 얼굴에 청순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처녀는 시큰둥하게 차를 내밀었다. 자스민 향이 반항적으로 내 코를 괴롭혔다. 일본 친구가 선물한 다기세트 중 유일하게 남은 잔과 받침 한 쌍이 눈을 즐겁게 하는 대신, 자스민차의 은근한 풀 냄새는 견뎌야하는 고역처럼 느껴졌다. 어디께 산에서 훌 뜯어다 대충 만든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림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했을 때, 그녀는 보통보다 큰 특유의 종이컵에 자스민 차를 우려 한 모금씩 마시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그녀는 말했다.


"아미예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이 움직였지만 기회를 놓쳤다.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앞서 걷는 사람을 따라가야했기 때문이었다. 장신의 키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아미는 종종걸음으로 급히 쫓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그를 충동질한 그녀의 눈빛은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마춤하게 맛이 좋을 온도의 자스민차를 얼른 내려놓았다. 에스프레소를, 영혼은 카카오 열매의 순결한 추출물을 원하는 듯했다. 아미에겐 다른 사람들이 자스민차를 남기건 말건 상관없어보였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는 나를 흘끔 바라보며 자신이 진하게 우린 쟈스민차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주근깨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타고난 피부미인의 얼굴은 조화로워서 흠잡을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 자고로 피부미인들이란 차를 좋아하는 특징들이 있는지, 그의 첫째 누이도 녹차라면 사족을 못 썼다. 미모가 빼어난 누이는 녹차없이는 살 수 없는 여인같았다. 웰빙붐이 일기 전부터 누이의 녹차신봉은 조카들에게도 마수를 뻗쳤고, 녹차붐이 일자 더욱 활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녹차아이스크림, 녹차호떡, 녹차면, 녹차맛 과자, 녹차라떼 없는 것이 없었다. 누이는 녹차라떼에 특히 열광했고, 조카 둘은 누이가 집에서 직접 만들어 주는 녹차국수와 요거트 전문점의 녹차아이스크림만 찾았다. 맛이 그리 길들어진 것이다. 그 집 냉동고에서 꺼낸 녹차 아이스크림을 한 입 떠먹으니 입안에 녹차향이 가득 풍겼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게 녹는 맛이 나쁘지 않았다. 그 즈음 누이는 보성녹차밭에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다. 이사라도 갈 기세였다. 다섯살 위의 누나는 미모와 카리스마로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는 남동생의 자랑이었다. 지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공부를 가르쳐주기도 했고, 가끔은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매부를 만나자마자 급속도로 이전의 모습을 잃어가더니 언젠가부터 녹차밖에 모르는, 대신 독선이 늘어가는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예전에 남동생의 자랑이었던 미모의 누이가 아닌 만날 때마다 잔소리를 늘어놓는 극성맞은 아줌마가 되어버려서,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남동생에게 누이가 거치는 일련의 변화가 그저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녹차 아이스크림을 꺼내놓고 상온에 방치하면 맛이 떫어졌다. 설거지를 하던 누이는 내가 아무렇게 내버려 둔 녹차 아이스크림을 앞치마에 손을 훔치고 얼른 냉동고로 도로 집어넣곤 했다. 녹차 붐은 사그러들었지만 그 집에선 여전히 녹차의 기세가 등등했다.


아미는 찾잔을 치우려고 다가왔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먹색이 번진 차받침을 신중하게 들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는 잘 웃는 편이었는데, 유독 나와 눈이 마주치면 퉁명스러워졌다. 함빡 웃는 얼굴이 더 근사했지만, 새초롬한 모습도 나쁘지는 않았다. 왕만두를 한 입에 우겨넣고, 잠버릇이 고약하다는 것도 알았지만 어느 하나 나쁜 것은 없었다. 다만 잘 웃어주지 않는다.


그녀와는 첫 만남에서부터 연고를 발라준 사이였다. 입김을 불어 까진 무릎의 흙을 떨어내주며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녀는 가엾게도 손가락을 떨며 눈물을 훔쳤다. 상처가 꽤 깊어 피만큼 진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래도 바울-그땐 그 개의 이름을 알지도 못했다. 지금도 좋아하진 않는다-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심시켰다. 바울은 이쪽에는 올 생각은 아예 없고 바닥에 턱을 괴고 멍충히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가끔 풀밭에 구른 귀가 가려운지 앞발 두개로 긴 귀를 문질렀다. 아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하마터면 바울을 놓칠 뻔 했기 때문이다. 목줄을 세게 잡았지만 날뛰는 동물을 제압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바울이 울타리를 뛰어넘으며 고양이에게 돌진할 때 그녀는 골든 리트리버의 힘에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을 다쳤다는 걸 알고 손가락에 힘이 풀리자 목줄이 그대로 떨어져 바울은 없어져버릴 것 같았다. 아팠지만 두 손에 온 힘을 주어 바울을 잡았다. 아직 일어설 수는 없었다. 그렇게 10여 미터를 끌려갔다. 아미는 지칠대로 지쳐 온몸이 흙투성이이고 그 새에 팔뚝도 흙바닥에 쓸려있었다. 흰옷의 이곳저곳에 피가 스며있었다. 목줄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바울은 쉴 새없이 짖어대고 있었다. 앞발을 내딪었다가 좌우로 우왕좌왕하고, 으르렁거리고, 아미는 본체만체하고 또 짖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미는 정말 바울을 놓쳐버릴 것 같아 서러웠다. 그 때 산책로 멀찍이에서 누군가 한 손으로 가뿐히 울타리를 넘고 단번에 아미 곁으로 달려왔다. 바울이 뛰어 넘은 울타리는 아미와 부딪혀 박살이 나 있었고, 나는 산책로가 아닌 비포장 지름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목줄을 잡아 당기며 아미의 손을 잡았다. 아미와 달리 한 손으로도 힘들지 않게 바울을 제압할 수 있었다. 아미는 그런 남성의 힘이 놀라웠고 더 서러워져서 왈칵 울고 말았다. 바울은 더 이상 고양이를 쫓지 않고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목이 마르다고 혀를 쭉 내밀고 가프게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미는 그 순간 바울을 콱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약이 올랐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서 주저앉아 눈물을 훔쳤다. 나는 그날 처음 만난 바울에게 호통을 쳤고, 아미를 집까지 부축해줬다. 그녀의 가족들이 놀라서 아미 곁으로 몰려왔지만 아미는 어쩐 일인지 가족들에게 전에 없이 퉁명스럽게 굴었다. 그림 속의 아미는 미완성인 채로 즐겁게 웃고 있었다. 아미의 가족들은 바울에게 한 마디씩 경고를 했다. 바울은 영문을 몰랐고, 목이 말랐다.


아미의 손을 잡았다. 셔링이 있는 얇은 블라우스는 얇은 팔을 그대로 느끼게 만들었다. 살갗이 비쳤다. 그녀는 어느 때건 대나무 잎에 맺힌 찬 새벽 이슬을 떠올리게 했다. 찬 이슬이 도르르 굴러떨어졌다. 아미는 손목을 약간 틀어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나 역시 순간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사뭇 놀라 손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그녀의 포트레이트 연작을 작업하고 있었겠지만, 당사자가 거절했다. 그녀의 입술은 정사각 틀 안에 꼭 들어맞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입을 비죽이 내밀고 말했다.


"싫어요."


누구라도 소화하기 힘든 진분홍색의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피부는 한층 빛이 났다. 허리에 굵은 실크 리본이 둘러져 있었다. 그 생에서 그녀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월,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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