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함의 무게
아미를 처음 본 순간, 본능적으로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산책을 데리고 나온 개에게 약간의 우려가 담긴 목소리로 뭐라고 말을 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음성, 그녀의 몸선, 특유의 움직임, 벼락을 맞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개의 목줄을 잡은 채로 고꾸라져 달리는 개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운명 때문인진 모르겠지만)그녀를 보고 있었던 연유로 나는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보호 본능이 발동하여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떨어트린 채 육상 선수 혹은 표적이 입력된 미사일처럼 그녀를 향해 뛰었다.
456413678이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물었다.
"그러니깐, 이제는 쌍둥이 불꽃을 찾는 걸 포기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왜 서두에 '그러니깐'이라는 말을 굳이 붙이는지 물어보는 대신 단순히 말실수이겠거니 여기며 456413678이 피식 웃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랬었지."
굳이 부인할 필요도 없었다.
"쌍둥이 불꽃을 알아보더라도 상대방이 병에 걸려 죽어버리거나, 사고로 죽어버리거나, 다른 짝이 있거나, 어쨌든 나는 홀로 남겨졌었지."
'그런 삶들이 너무 고됐어'라는 말만은 애써 삼켰다.
"자네는 쌍둥이 불꽃을 찾는 걸 언제 관두었지?" 이번엔 내가 456413678에게 되물었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사랑이나 명예, 재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흥미로운 영화를 감상하는 듯 나의 삶들에 관심을 두었다. 어쩌면, 456413678이 유일하게 얽매이는 건 타인인 내가 살아가는 여러 형태의 삶이었다.
"흥, 태어났을 때부터 관심이 없었던 거 같은데."
456413678은 이 세상 혹은 이 우주에 자신을 뒤흔들 수 있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턱을 추켜세웠다. 나는 그의 반응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가 지난 생애에서 연애를 하는 것조차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그의 자유로움을 동경하기도 했다. 쌍둥이 불꽃에 속박되지 않는 그의 삶은 얼마나 홀가분한가.
"사랑은 소모품일 뿐이야."
456413678이 말했다. 사랑이 계륵이라도 되는 것처럼 뇌까렸다. '별로 득이 되지 않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인 계륵이 누군가에겐 사랑의 감정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어느 시점의 사랑은 소모품이 맞겠군. 쌀통의 쌀이 한 톨 남지 않을 때까지, 두루마리 휴지가 동이 날 때까지, 소모할대로 소모하고 기다려야하니까. 그러니까 그녀를 찾는 내 마음이 한 톨도 남지 않을 때까지 소모되도록 할 수밖에 없는 거지. 자네는 평생, 아니, 온생애를 통해서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할 부분이겠지만 말이네."
병실 침대에 누워 456413678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옆 침대가 비워졌다. 이름표가 치워지고, 이불보를 갈고, 허물처럼 남은 쓰레기들이 깨끗이 버려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이 병동에는 시한부 환자들만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교류가 없었더라도 누군가가 죽었다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누구도 울지 않았고, 모든 청소는 기계적으로 이뤄졌다. 지구가 나이 들어가기 때문일까. 태초의 영혼들이 나이가 들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목적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나침반을 보지도 않고 와이파이가 연결된 채 떼로 움직인다. 몇 차례 세계 대전이 치러질 때 사람들은 좌파냐 우파냐 첨예하고 치열하게 각축하며 살았다. 나는 내가 겪은 몇 가지의 전쟁들을 떠올리며 '그땐 내가 죽으면 울어줄 동지애라도 있었지'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뉴노멀 시대에는 세포 단위의 전쟁이 발발하고, 한밤중의 날짐승처럼 눈을 부라리며 한발 앞에 도사리고 있다. 시대 정신에 의한 신념에 따른 죽을 각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조차 없어서 자기자신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시대. 너무 많은 페르소나와 너무 많은 선택 속에서 우왕좌왕하며 개성이라는 이름 아래 바로 자기자신을 매장시키는 시대가 되었다. 신념이라는 가치는 개성이라는 가치로 스리슬쩍 대체되었다.
과거엔 전쟁과 기근이 있었지만, 미세플라스틱이 있는 줄 알면서도 마셔야하는 물과 유해물질이 있는 줄 알면서도 수확해야하는 작물들, 유해한 약물들, 중독들, 자기파괴들, 도처에서 해롭지 않은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운 시대가 되어 있었다.
"넌 너무 무해해."
병실에 한 대밖에 없는 TV에선 주말 드라마가 틀어져 있었고 한쪽 병상에 앉은 환자와 그녀의 가족들은 귤을 까먹으며 드라마를 시청하며 작은 추임새를 넣곤 했다. 마치 나는 살아 있다는 시그널이라도 되는 듯. TV 드라마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역할의 남자 배우의 대사. "무해해"라는 말이 "사랑해" 만큼의 가치로 매겨진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설 속에서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넌 너무 무해해."라고 읖조리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대단위의 전쟁 선포 대신 세포 단위의 자기파괴를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그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고, 예견하고 싶지도 않은 변화였으며, 어쩌면 예언이나 예견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지극히 개개인의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었다. 변화는 더뎠지만 극적으로 일어났다. 사람들은 한번쯤 스스로 생을 끝장내고 싶거나 존엄사를 원하게 됐다. 오래된 지구의, 혹은 사람들의 프레임에 반기를 든 세대들은 각자의 포지션에서 붕괴되었다. 자기 파괴는 물리적으로 발생하기도 했고, 정신적으로 발생하기도 했다. 제대로 살아 있는 삶은 거의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발작적으로 도주하고 싶어했다.
나는 멍하니 사각형의 TV를 바라보다가 아미를 떠올렸고 "넌 무해하지."라고 읖조렸다. 21세기에 로미오가 살았더라면 했을 법한 최고의 고백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환점을 통과하는 마라톤 선수나 아무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두려운 감정이 아니라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길 바라는 두근거림이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알고 있을까.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 눈물이 고였는데 절망이나 좌절감에 의한 어떤 것이 아니라, 삶을 저버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치스러운 감정으로 흘리는 눈물이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먹지도, 움직이지도, 잠들지도 않은 채 살다가 당신을 마지막으로 만날 때 건강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마지막 한번은 함께 밥을 먹고 싶어서, 진종일의 시간을 들여 단장을 하고 그날을 기다리고 싶게 하는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얼마나 가슴 깊이 그녀를 사모하고 기다리고 있는지를 깨달으며 그 생의 마지막 나날들을 마무리했다. 그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