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페스토까진 아닐지언정
부모가 된 이후에야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자 무거운 고민거리인데,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내가 그리는 '율뽕이 엄마'로의 모습은 판타지적 느낌이 강했다. 무조건적이며 배려 깊은 사랑을 충실히 실천하는, 매사에 웃음과 여유로 아이를 대하는 '내가 이 구역의 오은영 박사다’ 정도의 레벨. 당연히 현실의 내 모습과는 큰 갭이 존재했고, 나는 내 자신에게 적잖이 실망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내가 왜 당연히 엄마의 역할을 잘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왜 그리도 육아서적에 집착했을까
이상적인 엄마의 모습과 내 모습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자기 환멸에 빠져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냈다. 너는 형편없는 엄마라고. 너 같은 인간은 엄마가 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며 쉴 새 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도대체 이 지옥의 쳇바퀴 속에서 내가 진실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욕구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았다. 내가 책 속에서 답을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제일 찾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나쁜 부모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해답이었던 것 같다. 나의 불안을 잠재워 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았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범했던 실수를 나는 하고 싶지 않다는 열망과 내가 받은 상처를 아이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사명감으로 답을 찾으려 애썼다. 아직 많지 않은(점차 많아질) 선진국형 어미*가 되어 이십몇 년쯤 뒤에 나는 비록 상처 받고 자랐을지언정 내 아이에게 상처를 물려주지 않았다고 자랑을 하고 싶은 욕망도 있는 것 같고.
하지만 그런 열망으로는 부족했다. 그건 진정한 해답이 아니었다. 내적 불행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서?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데? 아이의 인생은 그렇다 치고 너의 인생은?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건데? 이런 질문들이 땅 속에서 고구마가 줄줄이 달려 나오듯 내 머릿속을 잠식해갔다.
육아서적을 잠시 치워버리고 내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았다. 앞으로 남은 인생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그 시간 동안 내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이 어디인지, 내 삶의 키워드가 무엇인지 생각했고 나는 얼추 비슷한 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 로마서 12장 15~18절
네 옆에 있는 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연대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함께 울고 웃어주며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삶. 악을 악이 아닌 선으로 이겨낼 수 있는 인내심과 담대함을 가진 자.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되도록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삶. 너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는 속도전에서 비롯된 초조와 이기심으로 차갑게 마음이 식어버렸을 때마다 스스로 발광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네 마음을 뜨뜻하게 덥힐 수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것을 느끼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부터 나누고, 함께함으로써 더 많이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오소희 저
우리가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이 안 되는 누군가에게 먼저 내 밥과 옷을 나눌 수 있는 사람, 고통에 빠져 지하 100층에서 올라오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누군가를 101층에서 받쳐주며 지상으로 올려줄 수 있는 사람. 당장 내가 이 지구를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바꿔보려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나보다 뛰어난 너는 분명 더 멋진 사람이 될 테니.
가수 이적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쓴 짧은 글 중 지혜가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아이들과 살다 보니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전하고자 하는 지혜란 고작해야 짜파게티 마지막 물 잘 맞추기 정도가 아닐까 싶다는 글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몇 번 하다 보면 아이들은 스스로 최적의 농도를 찾을 것이다.
나는 부모 됨이란 내가 내 자리에서 잘하면 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 아이에게 뭘 가르칠까, 무슨 말을 해줄까를 고민하기보단 내가 평생을 바라보고 갈 삶의 가치를 정립하고 그곳을 향해 묵묵히, 뚝심 있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내가 먼저 세상을 살아본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과 그것을 위해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고,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는지를 정리해보고 있다. 즉각 실행이 가능한 것들과 장기적 플랜이 필요한 일, 현실적으로 내가 해볼 수 있는 일인지 허황된 꿈에 가까운 일이지를 구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변화하며 성장하는 나와 아이의 모습을 이곳에 기록할 것이다.
너와 함께 만들어 갈 나의 인생 2막.
엄마 자리에서 엄마가 할 일 열심히 할게.
사랑해, 나의 우주. 나의 첫 사랑.
* 선진국형 어미란?
아이에게 즉각적인 사과와 감사의 표시, 사랑의 표현을 매우 잘하는 엄마를 뜻함.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이 세 가지 표현을 적재적소에 진심으로 할 줄 아는 엄마를 말한다.
Title image from 시소 필름(인별 @seesaw_film)
본문 사진 by 딩크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