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한 친구보다 식기세척기가 소중하다.
아무리 편하고 좋은 친구라도 내 설거지를 부탁할 순 없으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부엌으로 간다. 어젯밤 나 대신 열일해준 식기세척기를 보살펴야 한다. 뽀드득 소리가 날 만큼 깨끗하게 씻겨져서 뽀송뽀송 마른 그릇을 서랍장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오늘 아침도 변함없이 식기세척기에서 그릇을 꺼내 정리하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왜 접시랑 숟가락이 끈적거리는 걸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머그잔을 꺼내 컵 안쪽을 살펴보았다. 어제 내가 마신 커피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럴... 리가? 나의 이모님은 이런 배신을 안겨준 적이 없었는데. 늘 뽀득거리는 그릇을 남기셨는데. 맨 아랫칸에 놓인 냄비까지 들춰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밤새 식기세척기가 일을 하지 않았다..!
어제저녁에 세척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잠든 것이다. 더러운 주방을 참지 못하는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처음 겪어보는 이 황당함.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런 실수를 한 나 자신이 싫지 않았고, 밤새 씻어져 있어야 할 그릇들이 음식 냄새를 폴폴 풍기며 나를 반기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냥 '음.. 까먹었네. 허허' 하고 세척 버튼을 누르면 끝날 일이었다.
한번 허탈하게 웃고, 상황을 수습하기. 이것은 내가 정말 못하는 분야였다. 지금도 어렵다. 뭐든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완벽하게 잘 해내야 내가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그것만이 나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실수가 잦고 매사에 나처럼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났다. 왜 저렇게 나사가 빠진 채로 사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온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늘 전전긍긍했다.
엄마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로서의 나도 완벽하고 싶고, 원래 나라는 인간도 완벽하고 싶었다. 아이와 완벽하게 교감하는 멋진 엄마이자, 엄마가 되며 잠시 멈춘 나의 인생도 찾아야 했다. 몸도 마음도 24시간 내내 바빴고, 오늘처럼 사소한 실수에도 나 자신을 몰아붙였다.
돌아가지 못한 식기세척기를 보며 웃어넘긴 내 모습이 아직 어색하지만 이렇게 조금 나사가 헐거워진 내 모습이 좋다. 어차피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다 잘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제일 중요한 하나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미뤄두고 살고 싶어졌다. 매사에 너무 다큐처럼 진지하지 않고, 조금은 가벼워지고 싶다.
도스토옙스키가 던진 물음. '사람은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신을 몇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 다른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까?' 이제 이 물음을 나에게 던져본다. 내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의 내 자아. 나의 분신들. 그것들을 연결하는 나사를 어디까지 조이고 풀어야 나를 지킬 수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