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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정 Dec 13. 2018

인터넷 홍위병

나만 맞고 너는 틀리다는 집단 열병

인터넷 홍위병 


요즘 새롭게 생긴 부류다.
관종을 넘어선 부류.
훈계와 집단 조리돌림을 위시한 집단.
인터넷 홍위병이다. 

그들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때로는 일베, 때로는 페미니즘, 때로는 남성, 때로는 여성
때론 진보와 보수를 넘나든다.

그들의 공통점은 내가 아닌 부류를 배척하는 것이다. 

자기가 당한 처지는 안타깝고, 
남이 당한 처지는 당해싸다는 태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고,
연예인이든 좀 알려진 누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세상 끌어내리려고 안달이 나있는 사람들.

그들은 왜이렇게 흥분하고 있고 왜이렇게 화가 나 있나.

그들의 행동이 중세시대 마녀사냥,
중국의 홍위병이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독일의 나치랑 또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들 모두 자기들이 세상을 바꾼다 믿고 있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일부는 맞다.

그런데 크게 보면 모두 틀렸다.

이 사회는 어느 한 집단만 살아남는 곳이 아니다.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나만 맞고 너는 틀리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 우리가 철학을 알아야하고 똘레랑스를 배워야하는가.

우리는 사회를 안정화하고 이어나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인류는 존속한다. 

평생 다른 집단과  척을 지며 살아가면 
행복해질까?

나랑 반대 집단을 모두 없애고 나면 
평화가 찾아올까?

삶은,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또라이 질량보존의 법칙
한번쯤 들어봤을 거다.

어느 집단에나 또라이는 반드시 있고,
없다면 그것이 나일지도 모른다고.

또라이가 한명 나가면 새로운 또라이가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반대 집단을 없애고 나면 
또다른 반대 집단이 나타나기 마련.

나와 너가 함께 어우러지며 살 궁리를 하는 것이 사회 아닐까. 


나는 인문학, 철학 빠순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멀어졌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인문학, 철학의 목표를 깨닫고 나서였다. 

인문학,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다. 

진정한 인류애를 가르치고 
서로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이타적인 삶을 가르치는 것이 인문학, 철학이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남과 가르면서 나를 찾아왔고
피곤한 남을 배제하면서 사는 삶에 만족했는데
내가 사랑해마지않았던 인문학이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런 뜻이었다니!!!!!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거야.
내가 맘에 드는 사람들만 만나고 
그들과만 교류하는 삶을 살거야!!!


그러다보니 나는 점점 고립되었다. 
내가 원하던 대로 됐는데 나는 왜 행복해지지 않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사람은 고립되서 살 수 없다. 


점점 나 빼고 모두가 싫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결국엔 그런 나 자신도 점차 싫어하게 되는 수순을 밟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희노애락의 집합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 사회도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모든 것이 혼재되어있는 것이다. 

저 위대한 소설가, 빅토르 위고도 말하지 않았나.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경찰)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그는 하늘이 내린 선을 지켜내는 신념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 범죄자인 장발장은 하늘이 버린 인간이다. 
그런데 어느날 장발장에게서 선을 보았다. 
아니, 이럴수가. 
타락한 인간이 어찌 선할 수 있는가. 
자베르의 신념에 큰 혼란이 온다. 
그걸 이겨내지 못한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빅토르 위고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빅토르 위고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어떤 행동이든 인간이 인간을 평할 수 없다고. 
(기독교적 세계관)
범죄자든 성직자든 모두 같은 하늘 아래 사람이라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넘어
내가 싫어하는 저 집단이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선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분법적으로 사람, 집단, 사회를 나누는 것은
위험하다. 


2018년이 가기 전에 
내 스스로 새로운 물결에 몸을 던졌다.

새로운 사람들을 스스로 만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오히려 나를 무기력과 절망에서 꺼내주었다. 


자기 중심이 없는 사람은
선동 당하기 쉬우며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다른 사람에게 훈계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젊은 꼰대라 부른다. 


많은 삶을 살아낸 사람들은 
되려 누군가에게 충고하기를 꺼린다.

굳이 충고하지 않아도 
그 행동 때문에 자멸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의 불행에 괜히 충고할 필요없다.
충고하고 싶다면 스스로를 돌아보자. 

내 인생이 불행해서 남의 의견에 왈가왈부하며 
내현생을 도피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너무나 불같은 인터넷 홍위병 열기에 
어지럼증을 느낀다. 


왜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지 못하나. 
이 열기를 이용해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인가? 
내가 아니라면 분노를 가라앉히자. 
나 없는 우리는 또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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