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을 벗어나며

감정 목적론

by 김존재

1. 이쯤 되면 심한 말 하는 것은 사람들 기본 습성인가 보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타인에게 상처 주는 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 역시 타인에게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타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 또한 그렇다.


상처를 가볍게 주고받으며 어우러지는 것이 옳은 건지 모르겠다. 누구도 옳다고 말하지 않겠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게 행동한다. 오히려 평등과 존중을 외치는 인간일수록 상처를 쉽게 입히는지도 모른다. 상처가 깊어 지향하는 이상이 원대해질수록, 그들이 뻗치는 가시도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단단해져 크고 작은 용기를 갖고 사람들 앞에 서고 싶은데, 가끔은 고꾸라진다. 나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나 희망은 냉철할 수 없다. 견고한 자아를 감싸고 살아가는 인간들은 사소한 모욕 정도는 가벼이 물리치며 살아가는 건가, 나는 아니다. 나의 부푼 기대는 서로를 할퀴지 않는 부드러운 공기를 상상한다. 미소를 투영하고, 관계를 그리고, 애정을 담는다. 뭉쳐 솟아오르는 기쁨이 나의 세계의 윤곽을 결정짓는다. 이렇게 마음으로 빚어놓은 세계의 풍경은, 가볍고 의식 없는 단 하나의 말에 의해 흘러내려 지워진다.



2. 감정의 등락이나 누군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다 보니, 나의 자아와 영감의 대부분으로 여겼던 우울 또한 사라진다. 슬프고 측은한 외투를 벗은 내가 남았다. 두툼한 겉옷을 끼워 입었던 나완 다르다. 익숙한 부분들은, 물론 나니까 있을 수밖에 없지만, 어딘가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지점들이 바뀌었다.


삶을 바라볼 때 갖던 인상에 있어 달라진 감정의 색들을 지니게 되었다. 물감으로 색을 만들어낼 때면, 미묘한 비율 차이가 결이 다른 색을 만들어낸다. 나의 변화는 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일어났고, 그로 인해 내가 시야를 채색하는 재료의 결 또한 바뀌었다.


나를 지배하고 틀어쥐어 놓아주질 않던 우울은 사실 내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아들러의 말대로 나는 우울을 바랐기에 우울했던 것이다. 애초에 내가 슬픈 것을 자신이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어차피 절망에 잠긴 나 자신을 바랐기 때문에, 어떤 사유와 어떤 예술을 지향하던 소용이 없었다. 무의식이던 의식이던 내가 그곳에 머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슬프고 침울했던 것이다. 신기한 건 이걸 느낀 때부터 우울에서 유리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어쩌면 가끔 발을 들일뿐 영영 침잠하던 기분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내가 우울을 열등감을 해결하기 위해 이용했다는 것이다. 외양과 애정에 대한 깊은 열등감 때문에, 그에 의해 패여버린 자아의 흉터를 보상하기 위한 우월 의식을 우울에서 찾은 것이다. 난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취급했던 때부터, 무의식적으론 열등한 나를 타인에게서 구분 지을만한 요소를 꺼낸 것이다. 남들의 우위에 설 수 있는 분야를 우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이것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판별할 수 없다. 다만 나의 생존에 그것이 도움을 줬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그때의 나는 정말 별 볼일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의존하며 나 자신을 유지할 방법은 절망에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월해지고자 하는 의지를 우울과 예술을 통해 발산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탁구를 즐기듯이 예술을 즐길 수가 없던 것이었다. 어떻게든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예술에 임하여, 작품을 보더라도 보다 나은 것을 느끼고, 만들어내더라도 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내길 갈망했던 것이었다. 그때의 예술은 나의 유일성을 보장해 주는 수단이었다. 독보적인 존재로서 산다고 믿도록 도왔을 것이다.


슬펐던 그 시기는 그렇게 지탱했었다. 그 또한 나의 일부이다. 우울에 깊이 빠진 것과 이제야 성큼성큼 벗어나고 있는 것 둘 다가 내가 거쳐와야만 했던 길이라고 생각한다. 절망 속 나를 부정할 생각 없고, 이제 와서 조금씩 웃고 있는 나 또한 부정할 이유가 없다. 모두 나이고, 모든 것은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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