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by 김존재


슬플 때 슬픈 것에 잠겨드는 것은 별로다. 그 감정이 온전히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울한 음악을 들어도, 오히려 딱딱하게 부딪혀 귀에 스며들지를 않는다. 팔다리에 실을 감은 우울이 한껏 춤을 출 때면, 예술 안에서 일렁이는 예술인의 절망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예술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들 또한 그렇다. 따뜻하고 유쾌한 감정이 나를 향해 날아오더라도, 그들이 퍼석거리며 부서지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울 안에 담긴 인간에게 타인의 감정들은 부스러기가 된다.


우울은 저마다 고유의 색과 향을 지닌다. 그들의 밀도가 강한 날일수록, 주변의 기분들은 집어삼켜지기 쉽다. 우울한 인간들은 그것을 안다. 그렇기에 그들은 지극히 혼자이길 바란다. 우울 안을 타인이 기웃거리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타인에게 우울에 대하여 발설하는 것이 범죄처럼 여겨지곤 한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절실하여 행동으로 드러나는데도, 구태여 말하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스스로의 망상이 자아내는 우울이 절망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인간을 누른다. 우울과 자기혐오의 뿌리는 같을 수밖에 없다. 그 둘을 자아내는 자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울은 스스로를 탓한다. 우울을 만드는 것도, 우울을 느끼는 것도, 우울의 근원을 좇아 고뇌하는 것도 모두 본인인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인간은 우울하고 싶기 때문에 우울해지는지도 모른다. 자연스레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경멸의 굴레는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상념에 빠져있을 때면, 타인들의 접근은 더욱 버거워진다. 부디 아무도, 눈웃음조차 짓지 않고 조용히 지나쳐줬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감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해한다면, 그 순간 세계에 대한 나의 허무를 인식할 것이고, 힘을 잃은 시야와 사고를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나를 안타깝게 여기던 부담으로 여겨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상관없다. 나의 우울에 대한 타인의 인식 자체가 버겁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울을 글로서 해소하는 것 또한, 타인에게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우울의 한계 때문이다. 타인의 우울을 무한정 받아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의존하게 된다. 앞뒤가 안 맞지만 어쩔 수 없다. 살아갈 힘을 친구들 덕에 얻곤 하기 때문이다. 웃음보다 나은 약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현학적이고 침울한 사람들에겐, 우울에 처연히 빠져들게 하는 인간들보단, 우울한 그들의 본성을 알면서도 미소 지어주는 인간들이 소중한 것이다. 그들의 미소는 우습게도 금방 나의 얼굴에도 맺힌다.


의지하는 인간으로서 예의는 지켜야 한다. 현실을 완연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박자를 헤쳐선 안된다. 그들에게 기댈 땐, 굳이 차박거리는 나의 말들을 꺼낼 필요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훨씬 좋다. 그들이 생을 살아가는 심박의 소리가 힘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가볍고 아삭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현실의 지면으로부터 떠오르던 나의 양 발을 붙잡아준다. 땅에 발을 디딘 나는 앞을 차분히 바라보며 심호흡한다. 그럴 때면 마음이 정말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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