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머무는 것은 검은 담즙 - 기질적 우울이다. 더 밝은 삶으로 나아가는 중이라 해도 이것이 내게 깃드는 때는 언제나 있다. 피할 수 없다. 내가 기꺼이 불러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너무 행복한 나머지, 현실의 색이 내 안에 완전히 들어앉기 전에. 현실이 나를 먹어치워 자아와 몽상을 잃기 전에. 정말 그런 것이라면, 스스로 우울의 성을 짓고 깊은 방 안에 나 자신을 뉘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푸는 감정들이 우울을 촉진시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을 애써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우울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통제 불가능한 감정, 통제 불가능한 것들에 의해 감정이 잉태한 통제 불가능한 기분의 낙하. 클레망스가 강에 스스로 떨어지는 인간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느꼈듯이, 감정이 추락함을 감각한다.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기점을 도려내는 슬픔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의도한 감정인지도 모른다. 우울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진정 떠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피어나는 기분인지도 모른다. 기질적 우울이란 생각은 그래서 들었다.
우울할 때 나의 표정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 인간은 대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없더라도 눈에 힘을 준다거나 입꼬리를 올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보다 덜 추해 보이는 얼굴을 보여야만 한다. 거울 앞에서조차 처연한 표정을 지으면, 자신의 추한 몰골이 어떤 식으로 엄습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그렇게까지 슬프고 기진맥진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다 버스 안의 반사경이나 밝은 날의 반짝이는 유리에 비친 자신을 직시하는 것으로, 사람은 본인의 심연 안 표정을 마주하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이미 자기 학대에 의해 취약해진 자신의 자아는 잠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의해 더욱 추해진다. 마음은 그의 우울에 의해 고스란히 짓이겨져 있고, 그럴 때면 자신은 추할뿐이다.
나의 표정을 보고 지나치는 사람들은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안해하지 않도록 근육을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나의 아집은, 모든 것을 경직시켰다. 흐느적 느려지기 시작한 것은 나의 몸만이 아니었다. 풍경은 뽀얀 석양빛 아래 멈춰있었다. 하늘은 개었고 바람은 푸르렀으나 내 눈은 잿빛이었다. 연홍색 꽃잎은 내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꽃들은 보기 좋게 흐드러졌다, 흐드러졌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나는 그들이 진정 흐드러진 것인지 물렁거리며 지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이런 것을 느끼는 데엔 분명 무의식이 바라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다. 상황 안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인간은, 시간이 흐르기 전까지 객관성을 가지기 어렵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기엔 본인이 모래사장의 한 가운데에 묻혀있기에, 불가능하다. 무얼 위한 우울인가. 오늘은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거라도 부여잡았지만 어떤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만해야겠다. 내가 그만하려고 하면 그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두고 싶은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길 모퉁이를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기분이다. 누굴 기다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