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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Apr 30. 2020

뚫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인간. 지금 나는 이루어내지 못한 영역의 실존 때문에 분열된다. 거무스레한 곳이다. 언어적인 환영처럼 두뇌 언저리에서 일렁인다. 어떻게와 무엇을, 그 차이는 극명하다. 내가 어떻게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사람들은 모래알처럼 많고 부서져가는 관계들도 얼마든지 늘어날 것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이 지워지지 않는다. 현실의 인간들은 열에 여덟이 끔찍한데,  초월적 이미지의 인간은 내 안에서 기독교의 그리스도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말' 살아있다. 


인본주의란 종교가 이를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날 순 있으나, 사회 밖의 인간은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행위조차 인간 외부에선 무효하다. 


그리고 난 괴물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적어도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괴물의 내피는 너무 끈적끈적하여 불쾌하다. 그리고 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감각이 두렵다. 뒤틀려 명멸하는 단상들이 나의 의식을 찔러 넝마로 만들어버릴까 봐, 뒷걸음질 치게 된다. 


니체의 예외적인 인간이란 이 공포를 이겨내고 인간 밖으로 나아가는 자들을 말하는 것 같다. 본질적인 소외, 인간의 본능 밖으로 달아난 공허의 공포를 감내할 수 있는 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강한 것이다. 고차원적인 의미의 강함은 사회 안에서 결정되는 요소가 아니다. 관념으로 사회를 부수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강하다. 


겁쟁이인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인간 안의 안존이 없는 삶은 상상되지 않는다. 사랑은 한때 나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독과 가깝기에 아니라고 여기는지도 모르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땐 그들의 영혼의 향취가 아무리 역겹던 정신을 아득히 뺏겨버리고 만다. 나를 육체에서 도려내어 인간 안에 던져주어도, 나는 웃으며 그들에게 나의 살들을 먹이 삼아 내어줄 수 있다. 


담대해져야만 한다. 사랑과 용기를 분리하는 중이다. 바스러지는 관계들의 조각은 언젠가 바늘처럼 나의 기분과 표정을 찔러 마비시키곤 했었다. 이제 난 그럴 수 없다. 사랑은 여전히 지니고 있으나, 심장은 철의 옷을 입었다. 눈앞의 사랑은 강인하나, 과거와 미래는 짙은 흑색으로 변해있다. 역시 사랑은 나의 본질에서 지워져가는지도 모른다. 현실의 변명을 써내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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