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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May 08. 2020

아버지 상에의 적대감


거미가 눈에 알을 까는 듯한 매스꺼움. 붕 뜬 대화를 오갈 때면 잊히는, 끈적거리는 언어. 저항에의 갈망, 내려다 보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들을 깨부수고 싶다는 극적인 열망. 개개인을 찍어 누르려는 의도들, 그걸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뱉어대는 언어들은 폭압이다.


반항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의 반항이라고 표명할 수가 없다. 단순히 개인에 대한 경멸로 모든 감정을 승화시킬 순 없다. 그것은 비겁한 일이다. 비겁하고 불합리하다. 개인만으로 분노를 말할 순 없다. 좀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다. 기저에서 모두를 집어삼키려는 무언가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깊은 눈빛이 있다. 어둑하고 창백하여 칼에라도 찔린 듯한 눈빛이다. 눈을 넣기 위하여 칼로 눈썹 언저리를 도려낸 것만 같은, 그런 눈빛이다. 그런 것이 세계엔 있다. 인간을 관조하는 그런 눈이 정말로 있다.


자아의 고립, 거부, 멸시와 흉터. 정신 분석학적으로 아버지란 존재는 자식을 훈육하고, 제도와 규율에 대한 인식을 불어넣고, 올바른 성장(아버지의 관점에서)을 할 때 칭찬해 준다. 아버지가 없는 인간은 그러므로 자유로워진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큰 선물은 일찍 죽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그랬다. 아버지의 부재로 세계를 억압하는 허상 - 규율과 제도, 본질에서 극히 어긋난 허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일찍부터 벗어날수록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비록 자유란 것이 막연히 공상되는 행복하고 웅장한 것이 아니라, 삶의 일반권에서 벗어나 붕붕 뜬 채로 풍선 같은 발판에 의존하는 불안한 자유이더라도, 자유는 자유이다.


어린 나이에 얻은 근본적 자유, 실에 매달려 세계로부터 떠서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 세계를 멋대로 관조하고 멋대로 해석할 자유, 그리하여 모두가 허무하고 모두가 우울해 보일 수 있는 자유, 그것을 나는 아버지의 부재로 얻은 것이다.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 나의 공허를 사랑한다, 자유로부터 깃든 공허와 허무. 아버지가 부여하는 가치들은 삶을 이루는 중요한 기둥들 중 하나이고, 그것이 없는 인간의 성곽은 흐물거리는 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부유감마저도 사랑한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타고나기도 그들을 사랑했으나,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나의 일부로서 즐겨야만 했다. 우울을 좋아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제도에 대한 적대감,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 우월한 척을 하는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 자유로부터 자라난 권위에 대한 경멸을 갖는다. 아버지가 없이 자라난 인간에겐 아버지란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비록 그 개인에 대한 증오가 아닐지언정, 인간 개별을 억압하는 정신 분석학적 아버지 상의 증표들은 하나같이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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