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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May 02. 2020

의식의 부유


나를 잃었다는 것은, 권태, 망상, 혹은 그 이하의 미약한 진동을 몸부림으로의 착각이었다. 스스로를 잃는다는 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애초에 스스로를 소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질 수 없다. 소유했다고 믿는 즉시 인간 내부의 무언가는 다시금 몸을 뒤틀면서, 어딘가로 빠져나가려 한다.


집중은 흩어진다. 의식의 상실,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일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소리친다. 궤변을 무기 삼아 세계를 헤쳐나가고, 스러지는 척을 해주는 피상의 잡초들을 바라보며 만족을 느낀다. 괴상한 표정이 깃들기 시작하는 그들의 귀는 견고하게 굳어져있다. 안으로 접혀 그들의 의지로 용접되어 있다. 딱딱하게 굳은 것은 그들의 마음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념을 갖는다고 나를 되찾는 것은 아니었다. 흐릿한 기분이 들 때면 어떤 음악도 귀에 와닿지 않았다. 언제나 나를 관통한다고 느끼던 음악도, 이럴 때면 그들의 자취를 감추고 타다 남은 재가 되어 남아있다. 재들을 헤집어도 손만 더러워질 뿐이다. 손의 상처들에 독이 옮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얼 헤집어도 나를 찾을 수 없다는 낭패감에, 당혹의 나는 휘적거리기만 했다.


잠을 이겨내야만 한다. 우울한 기분이 몰려올 때면 치유를 위하여 신체가 반응한다. 몸은 무엇보다도 본능을 향한다, 의식의 우울은 몸과 어울리지 않았다. 몸은 움직이고 호흡하고 뜯어 먹기를 원했다. 그렇지 못한 정신이 인간을 먹어치우려 하면, 몸은 무기력과 잠을 불러온다. 잠은 동굴에서 빠져나가려는 인간을 마취시키곤, 다시 안으로 끌고 들어와 벽에 묶어두려는지도 몰랐다. 잠에 드는 것이 두려워진다. 밤 위를 몸이 떠다니는 동안, 얼마만큼의 나를 의식으로부터 지워버릴지가 무섭다. 꿈에서라도 나는 항상 나이고 싶은데, 잠과 타인과 세계가 나를 나로부터 도려낼 것 같다. 아득한 곳으로부터 울리는 메아리가 사실은 나의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밤의 한가운데에 떨어뜨리고 와버린 나의 일부.


무언가를 먹어치우는 행위도 더부룩해진다. 의식이 몸을 밀어낸다. 한낱 정신이 몸 같은 실체를 쓰러트릴 순 없었으나, 정신은 나를 지배하고 몸을 좇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몸은 물론 굳건하다, 더부룩한 몸 마저 나를 쥐고 있다. 의식이 몸을 불쾌히 만들 순 있어도, 몸을 죽여버릴 순 없는 것이다. 몸에 순응할 때 인간이 행복하기 쉬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미 의식이 몸을 이겨버린 인간에겐, 몸의 행복도 의식의 행복도 희박하다. 의식은 가을 저녁 무렵의 사랑처럼, 달콤한 말로 인간을 꾀어내곤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도망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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