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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May 09. 2020

미학적 인간

나의 삶은 진리를 향한 것과 거리가 멀다. 애초에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인간이지 경계 너머로 나아가려는 인간은 아니다. 메이저와 마이너, 미학적 양극의 중용과 결합에서 보다 아름다운 것을 좇는다. 마냥 소수이고 개발되지 않고  특이한 영역만이 관심의 전부는 아니다. 그런 영역들을 발굴해 나가면서 가끔씩 마주하는 보석들 앞에서 희열을 느끼는 탐구자적 인간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나는 탐구보단 탐미가 좋은 것이다. 새롭고 좋은 것보단, 더 아름다운 것에의 갈망을 느끼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새로운 것에 있을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보다 아름다운 것, 그리고 또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대중이 희석되고 극단적인 아방가르드가 희석되어, 수면 위에 떠오른 개인 고유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뚫을 수 없는 벽 허무 앞에서 나는, 그리고 나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와 미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삶의 의의를 얻는다. 힘에의 의지가 우리에겐 보다 아름다운 것 그 자체를 좇는 것으로 발현된다. 결국 굳건한 허무의 벽 앞에선 인간 각자에게 주어진 희열을 좇아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그에 따라 인간 군집이 형성되는 것이다. 어떤 방식과 과정을 거쳤든 우리들은 개인 객체의 내재적 세계 안에 존재하는 미학적 이상을 좇는, 그리고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펼쳐내기를 바라는 인간들인 것이다. 소수자들인 진정한 미에 대한 고뇌자, 탐미자들이 삶과 예술의 경계에 있다.

진리, 나는 오히려 진리를 좇는 일이야말로 철학자들에게 맡겨놓는 것이다. 철학은 좋지만 진리에의 갈망이 없다. 진리에의 갈망 또한 그에 어울리는 인간이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끝없이 개발되어가고 발전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숭고한 지식인들 앞에서, 발전되어가는 경계를 코앞에서 묵시한다. 그러나 그들을 돕기보단 그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는 세계의 단상과 허물어지는 경계들을 지켜보며 나의 안에서 그들을 융화시켜 또다시 예술로 빠져드는 것이다. 우리들은 춤을 추면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을 본다. 

허무의 벽을 어떤 초인이 뚫게 될지는 모른다, 뚫게 되면 좋겠지만 사실은 별 관심 없다. 허무로 빚어진 관념적 종말들을 지켜보는 절망과 희열이 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내 삶을 종결시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포함한 세계를 관조할 때 인간에게서 터져 나오는 감정과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 앞에서의 초월적 희열, 진정한 예술은 성욕마저도 잊게 한다고 쇼펜하우어가 말하듯, 예술에 담긴 감각들에 고래가 바다에 빠지듯이 인간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술가와 미학자이다. 어쩌면 쾌락주의자들 다음으로 허무주의에 잘 적응한 것이 우리들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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