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존재 Nov 11. 2020

울음

나의 연인은 소리 없이 운다. 


흉터를 감추기 위해 앞면만을 비추며 살아가는 그들. 스스로를 자신 안에 가두어 적게 드러내고 많이 감춘다. 밝게 인사하고 친절히 미소 짓는다. 좋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신념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가. 눈물을 알리지 않는 사람들,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기에 알 수 없다. 


양면이 존재하는 건 인간의 숙명이다. 그들의 앞면은 자애롭고 풍요로우나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무한하지 않다. 타인의 말과 행동 때문에 일그러진 표정들이 뒷면에 자라난다. 앞면이 감내한 감정은 뒷면으로 스며든다. 밝은 곳을 견고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다 보면 뒷면의 우울은 등한시된다. 돌보지 않아 무감각해지고 병들어가는 뒷면, 터진 상처에서는 이따금 파편이 쏟아진다. 앞면은 여기저기 찔려 이내 마비된다. 미소 짓고 싶어도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다. 언제는 뒷면의 고통이 앞면을 집어삼킨다. 그들은 어쩔 도리 없이 홀로 숨죽여 운다. 자신을 돌보기 위한 최소한의 눈물을 담는다. 


타고난 이타심과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이기심 둘이 섞여있다. 동물로서 요구되는 이기심만 존재하고, 그 이상은 타인을 위해 덜어냈다. 그들은 몰입한 모두의 행복을 꿈꾼다. 그것이 원대한 이타심이다. 그러나 이상에 걸맞게 행동하는 인간은 많지 않다. 늘 잿빛인 세상, 무미한 곳에 의미를 투영하여 살아가려 하나 녹록지 않다. 이상은 결국 현실이 아닌 낭만이자 꿈이다. 그들은 슬프다. 또, 언제나, 다시. 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망가져있다. 더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은 채로 인간들은 여전히 주제를 모르며 남을 폄하하고 경박하게 웃고 떠들고 무지하다.


그럼에도 앞면을 포기하지 않는다. 너덜너덜한 뒷면이 나아지지도 않았는데 일어선다. 타인의 동정을 원치 않는, 타인에게 알리지도 않는 혼자만의 눈물을 머금고 다시 살아간다. 숭고하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러듯이. 그들은 신을 품은 인간처럼 보인다. 그래서 감히 위로하기 어렵다. 내가 그를 슬프게 한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의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