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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Oct 15. 2021

부산 그리고 대구를 거쳐 광주까지

결국 종착역으로 다다랐을 때 느낌 내 감정

101번째 에피소드이다.


아래 연재하고자 하는 건 영호남문학청년학교 공동도서집에 실린 나의 글이다.


나는 부산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태어났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산 위에 있었는데 부산(釜山)의 ‘산(山)’자가 뫼산이라는 것은 삶을 통해서 몸소 알게 되었다. 집이 산 위에 있다는 건 부산에서는 경제적으로 하위 계층을 의미한다. 밤마다 옆집 부부싸움 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며 저녁어귀에 산동네로 모두가 지친 표정을 하고 퇴근하는 모습은 내겐 익숙했다. 물론 그 속에는 우리 엄마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부터 동네가 난리였다. 밖을 뛰쳐나가보니 재개발 공사로 인해 우리 동네보다 지대가 높은 공사 현장에서 지름 1m는 족히 될 것 같은 바위가 굴러 내려와 있었다. 앞 집 대머리 아저씨는 화가 나 공사현장 소장과 담판을 벌일 기세였다. 엄마가 나를 품속으로 껴안으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은 3가구가 1개의 공동화장실을 쓰고 있었고 얼마 뒤 또 한 번 돌이 굴러 내려와 공동화장실이 반파되었다. 또 한 번의 난리가 났을 무렵, 나는 내심 공동화장실이 아닌 각 집마다 화장실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집은 ‘대응’보다는 ‘도주’를 택했다. 어찌 보면 산동네에서 조차 집 한 켠 가지지 못했던 사글세 생활에 익숙한 우리 가족에겐 당연했다.


초등학교에서 반장을 하다가 선생님께 혼이 났다. 이유인즉슨 ‘왜 한번도 어머니가 학교에 오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내가 반장인 것과 엄마가 학교에 방문해야 하는 상관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내가 분명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걸핏하면 나를 불러 혼을 냈다. 참다못해 엄마에게 이 같은 사정을 말했다. 엄마는 어렵사리 시간 내 학교를 방문했고 촌지를 조용히 놔두고 돌아왔다. 얼마 전, 엄마의 환갑 날 또 한 번 그 기억을 꺼내며 나에게 넉넉한 부모가 못 되어 미안하다고 했다. 나와 엄마에게 그 기억은 평생 남았다.


우리 엄마는 미싱 공장에서 일하는 기본급도 없는 비정규직이었다. 학교에서 호구조사 할 때  엄마 직업란에 ‘시다’라 자신 있게 적었다. 공장에서 우리 엄마를 누구나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크고 나서 그것이 ‘시다바리(일본말)’  이라는 알게 되었다. 평생 마음속에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남았다. 사춘기를 거쳐서 내 몸집이 엄마보다 크게 되었다. 저녁 즈음 엄마가 일하는 공장으로 마중 나갔다. 엄마는 김장을 하려고 배추, 열무를 근처 재래시장에서 구입했는데 이걸 들고 갈 수가 없어 나를 부른 것이다. 아버지와 같이 살지도 않았고 자가용도 없었기에 엄마가 기댈 곳은 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엄마의 일터는 내가 보기엔 참!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40여 평 남짓한 공장은 곳곳에 원단을 쌓여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미싱은 쉬지 않고 열기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에어컨도 없는 선풍기에 의존한 채, 귀는 라디오에 의존하여 엄마는 하루에 열두시간씩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그곳에서 보냈다. 배추를 이고 열무를 들고 엄마와 함께 걸어오면서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주로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내가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을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리고 아버지와 다시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집 마련, 주말에는 쉬면서 가끔 바람 쐬러 여행가고 싶다는 꿈.. 소박하지만 그랬다. 엄마가 밤마다 버스가 끊긴 시간에 혼자 걸어온 그 길을 걸으며 고독함을 이겨내야 하는 부모의 삶을 무게를 어렴풋이 느꼈다. 나는 그렇게 성숙함이 더 익숙해져갔다.

 

대학을 대구로 가게 되었다. 공부는 곧 잘해서 엄마의 바람대로 주요 국립대들의 러브콜을 많이 받았다. 그 중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경북대학교로 나는 향했다. 대구는 친척도, 지인도 심지어 학교 동창들도 아무도 없는 무연고지였다. 그렇게 나와 대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부산에서 대구로 온 난 특이한 사람이었다. 첫 질문은 대개 “부산대학교를 가지, 왜 경북대학교를 왔어?" 였다. 앞선 내 사정을 구구절절 말하기가 귀찮아서 멋쩍은 웃음으로 일축해버렸다. 대구는 참 특이한 도시였다. 부산과 KTX로 1시간 남짓 거리였지만 도시 느낌은 전혀 달랐다. 부산이 여러 군데 문화 요소가 나눠져 있다면, 대구는 한 군데로 집약되어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런 이질감은 내가 대구를 폐쇄적이고 배척하는 분위기를 느끼며 부산을 숨기고 대구를 강조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을 택하는데 일조했다. 대구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제안한 내용을 설득시키기 위해 이곳, 저곳 발품을 팔고 돌아다녔다. 최대한 부산을 숨기고 대구를 강조하면서 나는 다가갔다. 대구의 저력은 거기서 나왔다. 부산과 대구라는 지역구도가 허물어지고 경제적 여건에 관계없이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교육 기회의 제공을 위해 모든 관계자들이 발 벗고 나서주었다. 대학, 교육청, 후원자 등이 모여 함께 고민해주기 시작하였다. 도시를, 그리고 불공정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일이라면 너도 나도 두 손, 두 팔을 벌려 함께 했다. 그 속에서 시민사회 활동은 성공했고 수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때부터 대구가 나에게 완전히 들어왔다. 대구는 더 이상 나에게 부산을 묻지 않았다. 대구인으로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의견을 물었다. 그렇게 스무살 이후 대구는 나에게 잊지 못할 도시가 되었다.

    

내가 제안했던 시민사회 활동은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했다. 모델은 여러 도시로 전파되었고 어느 순간 난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는 사람으로 변모해있었다. 대구, 부산, 그리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광주였다. 첫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싣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광주 유스퀘어, 그리고 전남대학교에 대한 막연한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전남대학교의 정문 메타세콰이어 길을 넘어 본 옛(舊) 본관에는 광주 민주주의 정신이 그대로였다. 순간 느낀 먹먹한 감정은 이루 표현할 수 없으리라. 며칠간 더 머물었고 광주의 시기는 우연의 일치와도 같이 5월이었다. 전남대학교 곳곳에는 건물 옥상에서부터 바닥까지 닿는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웅장하리만큼 두려웠다. 내가 두려운 감정은 느낀 건,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해 동감했으며 앞으로 내가 민주주의 가치를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책임감에 대한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이었다.


부산부터 시작해 대구, 광주까지의 종착역으로, 다다랐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불공정과 불평등’을 깨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자기 위로이자 도시 속에서 일어나는 공정 사회에서 대한 수없는 고뇌였다. 그 고뇌가 부산에서 성장기에는 불편하리만큼 고통스러웠고 내게 열등감의 산물이자 성숙함을 동시에 선사한 요소였지만, 또 그를 해결하기 위해 스무 살 이후 내게 무연고지였던 대구에서 시민사회 운동을 시작했고 모두가 ‘공정한 기회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았으며 성공모델을 가지고 광주로 와서 민주주의 가치를 무거운 책임감으로 맞이했다. 길고도 단순했던 내게 다가온 영남, 그리고 호남의 여정은 하나의 가치로 다가왔다. 그 가치를 내세우며 모이는 우리에게 지역갈등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한 인간으로 태어나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공정한 기회를 통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나아간다.'

     

이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 가치로 우리는 구태 연연한 지역갈등을 넘고 분명히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서로 손을 맞잡고 언제든지 협력하고 교류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그걸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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