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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Jan 05. 2022

영어라는 내겐 거대한 산

생존형 로스쿨 입성 준비-2

135번째 에피소드이다.


언변과 장문 실력은 탁월했다. 세종대왕의 피가 고스란히 내게 전해진 것 같다. 글은 빠르고 정확히 잘 쓰며, 말은 정확한 요지를 짚어서 재미있게 대화의 흐름을 주도해나간다. 이것으로만 따지면 나는 '사기' 유닛이다. 하지만 여기서 '영어'란 놈이 등장하면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내가 영어를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못하게 된 건 전적으로 내 '아집' 때문이다.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다.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 고쳤어야 했는데.. 서른 넘어까지 그 '아집'은 이어져오고 말았다. 알파벳을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배운 7차 교육과정 세대다. 누구나 그렇듯 영어를 접할 기회는 없었고 알파벳을 외우지 못하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다.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난 그 누구보다 암기력이 좋았다. 특히, 순간을 사진처럼 찍어 외우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난 알파벳을 잘 모르지만 그냥 그 단어를 외우기로 작정했다. 미친 소리같이 들릴 수 있겠지만 정말 그랬다. 즉, 표의문자인 영어를 표음문자로 외워버렸다. 'Apple'이란 단어를 "에이, 피피, 엘, 이" 발음기호가 이렇게 적혀있으니~ "에~플"이라고 외운 것이 아니라 그저 'Apple'이란 글자를 유사하게 그린 그림을 보고 어떻게 읽는지는 관심없고 이렇게 생긴 형태의 글자를 "사과"라고 하자! 이렇게 명명해버린 것이다. 신기한 건, 이 방식이 중학교 때까지는 영어 100점을 놓치지 않고 통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로 들어가서 서서히 균열조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신은 어떻게 버텨내었는데, 모의고사에서 특히 듣기영역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다.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반타작 이상을 한다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3등급이란 박스권에 갇혔고 난 그 박스권에서 3년간 벗어날 수 없었다. 3년간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3등급을 받았다. 그게 나와 영어의 악연이다.


감이 잘 오지 않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실소를 금하지 못한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어떤 수업을 하다가 "버짓~"이란 영어단어를 듣고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응?"이라고 했더니 "Budget"이라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 그래?" 난 그때까지 "부드겟트" 이렇게 읽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단어를 읽을 필요가 없고 'Budget'라고 생긴 단어는 "예산"이라고 하자! 이렇게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살았다. 'Voucher'를 "보초"로, 'Buy'를 "버이"로 읽는 건 흔한 일이었다. 내게 영어발음은 별로 안 중요했다. "상품권"이라고 하자! "구입하다"라고 하자! 가 더 쉽고 빠르고 익숙했다. 그래서 난 '영어'를 일반 평균보다 못한다. 이렇게 쌓인 '아집'은 쉽게 떨쳐내긴 쉽지 않았다. 영어라는 것이 삶을 살면서 대한민국을 벗어나지 않은 이상 그리 장애물인 적은 없었다. 파파고가, 구글번역기가 내겐 친구였고 영어잘하는 사람들은 전신에 깔려있으니 그에게 도움을 청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내가 잘해야한다.


로스쿨 입학을 준비하며 나는 LEET 보다 솔직히 영어성적이 더 걱정된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분들이 많겠지만.. 솔직한 심정이다. 지원기준 점수는 시작점이지 최종점이 아니다. 내 딴에는 정말 자존심을 내려놓고 공부해서 얻는 토익점수가 800점 초반이다. 내 언변과 장문실력을 본 이들이 가지는 환상?이 와장장 깨지는 대목이다. 사실 부끄럽기도 하고, 토익점수 900점 이상이 널린 세상에서 떳떳하게 말하기가 부끄러운 적이 많았다. 이젠 '생존'이다. 남의 도움이 아니라 내가 잘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니 '아집'부터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벌써 책상 한켠에는 토익 책들이 자리잡고 있다. 진짜 현실이다.


남들에게 쉬운 일이 내겐 가장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영어라는 내겐 거대한 산을 넘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 산을 넘고 난 반드시 생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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