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커피 한잔의 여유 May 25. 2022

번외. "그래서 우린 지금 고독(孤獨)한가?“

청년재단 매거진에 기고한 글

번외편이다.


브런치의 장점은 누군가의 생각에 공감하는 이에게 협업 제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난 제멋대로이다. 누구에게 보여주는 건 관심없다. 그저 마음 속에 있는 내 감정을 내지를 뿐이다. 그게 온전히 글로 표현된다. 내 글의 가장 큰 장점은 '옆에서 육성을 틀어놓은 것 같은' 이라고 타칭으로 평가한다. 아마 내질러서 그런 것 같다. 글의 기고자이긴 하지만 출처를 청년재단임을 명확히 밝히며 번외편으로 짧은 소회를 전하려고 한다.


여기서 가장 힘 주어 말한 문장은 << 공감한다는 건 그 격차를 줄이려는 인간성 회복의 필사적인 현실 저항이다. ‘공감이란 감정선은 이해해보려는 의지, 노력, 그리고 순간적인 집중력이다. >> 이다. 새벽에 글을 쓰며 이 부분을 쓰다가 나도 모르고 눈물이 왈칵 나왔다. 인간성 회복을 위해 필사적인 현실 저항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며 대한민국 사회가 낭만은 몰라도, 희망과 웃음을 지키기 위해서 였을지 모른다. 한번 읽어볼만한 글이다.


[리얼리뷰 청년매거진] 2022-8호. "그래서 우린 지금 고독(孤獨)한가?“


난 공감을 잘하고 있었을까?
 
우연한 계기로 정기적으로 청년들을 상담을 해 주었다. 내가 겪어온 다양한 사회 경험이 청년들에게 도움을 주리란 막연한 기대감은 있었지만 투철한 사명감까진 없었다. 내가 쌓아놓은 경험치를 공유하는 선(善)행의 한 종류라 생각했다. 다만, 이 감정선이 자칫 방향을 잘못 틀면 선민사상(選民思想)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상담 중에 탐탁지 않은 상황들과 마주하곤 했다. 무기력하고 삶의 의욕이 없어 보이는 청년에게 물었다.
 
“나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먼저 찾고 그것을 오래 할 수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어요.”
 
그 청년의 답변은 이랬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벌써 저는 이십대 후반으로 다가가고 있어요. 늦은 것 같아 무섭고 두려워요.”
 
그 대답을 듣고 갑자기 화가 솟구쳐 올라 서둘러 상담을 마무리 지었다.
아마도 그때 내가 하고 싶었은 말은 “세상이 얼마나 냉정한데 노력을 해서 실력을 쌓아야지, 그리고 이십대 후반이 뭐가 늦었다고 두려움에 떠는거야. 세상과 맞서 싸워야지. 그게 인생이야.” 였을 것이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애써 눌러 담으며 선민사상(選民思想)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근본적으로 그것이 인생 진리이며 우리 선조들이 선험적으로 쌓아온 황금 열쇠일 수 있다. 단, 여기서 빠진 감정선이 하나 있다. 바로 ‘공감(共感)’이다. 공감 없는 선의는 선민사상으로 빠지기 쉽다. 난 ‘공감’을 잘하고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청년 고독사 해결의 출발선공감을 깨우다
 
‘향(香)기나는벗님들’은 청년고독사연구센터로 당사자성을 중심으로 한 청년 실태조사, 건강 커뮤니티 활동, 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수행하고 있다. 고독사 현장 특수청소, 유품정리 서비스업을 제공하는 사회적기업인 협동조합 리본과 협력하여 현장성을 기반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 청년을 만나기도 했고, 안타깝게 삶을 등진 청년 고독사 현장에서 청년을 추모하기도 했다. 인간은 모두가 동일하지 않다.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며 그로 인해 직업, 가치관, 경제적 수준까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온전히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감’한다는 건 그 격차를 줄이려는 인간성 회복의 필사적인 현실 저항이다. ‘공감’이란 감정선은 이해해보려는 의지, 노력, 그리고 순간적인 집중력이다. 그 현장을 벗어나면 또 잊을 순 있지만 기억세포는 유사한 상황에 어김없이 나타나 내게 ‘공감’을 깨우곤 했다. 여기서부터가 대한민국 청년 고독사 해결의 출발선이다.
 

공감의 제스처로 맺는 관계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부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 말해왔다. 그 진리는 불변하며 사람과의 관계 형성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청년들은 사람과의 관계 형성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 동일한 공간, 지역은 친밀감을 대표하지만 거리적인 친밀감이 정서적인 친밀감을 담보하진 않는다. 청년들 사이에서는 회사 상사, 동료와의 저녁 식사보단 집에서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그리고 유사 관심사를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모임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님’으로 부르는 것이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존중의 의미로 표현된다.

<90년생이 온다.>란 히트작 출간되고 벌써 3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우리 선조들이 선험적으로 쌓아온 인생의 진리가 절대시되며 도태된 이들에 대한 ‘공감’의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로 인해 밀려난 이는 더욱더 움츠러들고 관계 형성에 실패한다. 이들의 도피처는 유일한 자신의 공간인 ‘집’이다. 집(home)은 안락하지만 집(house)은 불행하다.
 
최근 동네커뮤니티 등에서 ‘소셜다이닝’ 형태로 가볍게 식사를 하며 유사 관심사를 공유하는 프로그램이 종종 보인다. 적극 권장할 만하다. 큰 성공은 작은 성공의 누적 결과물이다. 오늘부터 대한민국 청년을 본다면 공감의 제스처로 관계를 맺어보자.
“그래서 지금 고독(孤獨)하십니까?”



출저: 청년재단

 - https://kyf.or.kr/user/boardDetail.do;jsessionid=B709EFBF97E85856ABF330687D5860FC

청년재단에 청년고독사 관련해서 기고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주경야독과 짬짬이 전략: LEE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