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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Aug 16. 2022

유교사회를 벗어던져라

예송논쟁에서 벗어나 실사구시를 외쳤던 '실학' 그리고 다양성과 혁신성

168번째 에피소드이다.


오늘 에피소드만큼은 호불호가 가장 크게 나뉠 것이다. 그만큼 '유교'는 생활 속에 깊숙이 박혀있다. 조선 500년 역사는 유교로 시작해서 유교로 끝난 사회이다. 한국사를 공부하다보면 가끔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에 특청계층과 분야에서 권리가 되레 후퇴한 점이 눈에 띄었다. 자녀 중 여성이 있을 때 재산상속 비율은 고려가 조선보다 평등했다는 아이러니가 대표적이다. 유교는 선조들에 대한 얼과 예를 다하는 것이 근간이 되므로 그 도가 지나치면 '예송' 논쟁과도 같은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쓸데없는 파국이 일어나기도 한다. 붕당정치의 폐해로 많은 사례가 언급되지만 '예송' 논쟁만큼 기가 차는 역사적 사실은 없다. 상복을 입는 기간에 따라 그 의견이 받아들여지면 반대파는 숙청당하고 또 이긴 자는 내부적으로 당파가 갈라지고 왕의 간택을 받는 세력이 결국 승리한다. 조선 후기의 참상을 일컫는 세도정치는 근대화로 가는 변곡점을 철저히 날린 역사였다.


유교사회는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를 쥐락펴락한다. 나이, 학벌, 그때까진 거쳐온 직위가 현 시점에서 주어진 역할보다 더 중요하며 그로 인해 과거의 영광이 현재의 각자 위치를 존중 아닌 무시로 전환시킨다. 이따금씩 '예의없다.'는 문장에 대한 사색에 빠져보곤 한다. 필자 역시 가끔 '예의를 지키면서 일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듣곤 한다. 혼자 산책을 하며 찬찬히 그 상황을 복기해보면 대부분 직급을 막론하고 토론방식으로 격렬하게 논쟁을 한다거나, 업무가 끝나면 회식을 가지 않고 집에 가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다고 말하거나, 누가봐도 캐쥬얼한 복장으로 미팅을 나가서 사담을 줄이고 노트북을 켜고 핵심만 이야기하고 일어설 때 듣곤 했다.


스타트업에서는 '영어' 이름을 지어 부른다. 필자도 그 당사자가 되니 아래와 같은 장점을 발견했다. 우선 ~님, ~씨라고 부르지 않기에 직급을 부를 필요가 없다. 또한 직무 중심이기에 직급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이도 정확히 모르고 (어림짐작만 할 뿐) 심지어 가끔은 그 동료의 한글 이름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기에 그 자체로 하나의 조직 속에 일(work)로만 온전히 녹아든다. 실용과 실질만 있으면 반드시 일(work)은 된다.


유교사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양성은 키워나가기 힘들다. 가끔 필자 스스로도 '리버럴(자유주의자)'의 성향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그게 뭐 어때서' 인데 저변에 깔린 인식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시각이다. 입양, 이혼, 이민, 패션, 성적 자기결정권 등 다양한 사회문제로 다루어지는 아젠다에서 다양성을 누구보다 존중한다고 생각한다. 한가지 여기서 말하고자 싶은 건 다원화되는 사회 속에서 '정답일 수 있는 인간의 군상'은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각자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의해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해서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을 누가 평가하고 탓할 수 있으랴는 확고한 생각이 있다. 이전까지는 대한민국 사회는 유교사회를 중심으로 집단주의적인 행동양식을 보이면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왔음은 틀림없지만 그 이후 선진국 사회로 진입하며 그 동력에 한계를 맛보고 있다. 그 중심에는 다양성에 대한 절대적 존중 부족이 가장 크다고 자부한다. 혁신성은 국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인 중 그 누구 하나가 포문을 열고 살을 붙여나가는 과정이다. 미국의 앨런 머스크는 논란덩어리이긴 하지만 그 혁신성과 창의성은 자타공인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앨런 머스크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과연 그는 정상인 취급을 받았을까? 그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혁신의 성취에 대한 열매를 따먹는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뿌리내린 유교사회에서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제시보다 '할 수 없다. 해야만 한다.'는 가능성의 축소 그리고 권위주의적이고 맹목적인 의무를 더 많이 낳는다고 본다. 그 역기능에 사로 잡혀 있는 한국사회는 이 시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계급장 떼고 맞장 뜨자' 란 자극적인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유교가 그리 강조했던 체계와 계급 문화를 떼고 구성원 각자의 고유 행동과 장점만을 극대화하는 존중과 이해의 한국사회의 협력(또는 협동) 프로세스가 필요한 시점이다. 함께 동료로 일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나이, 학벌, 그때까진 거쳐온 직위(과거의 영광) 등 권위의 산물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다양성의 존중, 거기서 파생되는 혁신성을 저해하는 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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