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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Sep 21. 2022

엄마의 수학여행

중학교 3학년 된 엄마, 또래 친구들과 추억 쌓기

181번째 에피소드이다.


밤 약속까지 마치고 아파트 현관 문을 여니 오후10시 무렵이다. "다녀왔니?"하는 익숙한 음성 대신 정적이 나를 맞이한다. 어제 밤부터 난리였다. 새벽5시반으로 핸드폰 '알람'설정을 다시 해달라는 엄마는 짐을 싸며 설레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침 새벽 6시에 나를 흔들어 깨우며 카카오택시를 잡아달라는 엄마의 요청에 잠결에 수학여행 집결장소로 위치를 찍어 아파트 현관 앞으로 부르고 그대로 기절했다. 난 비몽사몽이었지만 현관을 나서는 엄마에게 카톡으로 택시번호를 있는 힘을 다해 남겨두었다. 그렇다. 엄마의 수학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중학교 3학년인 우리 엄마는 또래 친구들과 추억 쌓기를 하러 2박3일 간의 여행을 떠났다. 평생 애만 먹이고 도움은 크게 되지 않은 나, 그리고 아버지를 뒤로 한채 자신과 또래 친구들을 위한 시간이 생긴 거다.


며칠 전, 밤 늦게 들어온 내게 다급한듯이 ATM기에 가서 입금자명을 어떻게 3학년O반O번 KOO으로 쓸 수 있는지 물어왔다. 수학여행비를 내야하는데 인터넷뱅킹을 쓰지 못하는 엄마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평생 일하고 또 일하고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던 엄마에겐 "소속"을 표시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그런 엄마에게 이제 어엿한 "소속"이 생긴 것이다. 소속감은 엄마를 춤추게 했다.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그런 쉬운 문제를 직접 가야하는 ATM기로 풀기보다는 내가 수학여행비를 내 계좌 인터넷뱅킹으로 내주기로 했다.


"수학여행 용돈 대신 수학여행비로 퉁쳐요."


꼭, 돈 내고 욕 먹는 사람들이 있다. 전형적으로 나 같은 부류를 말할 걸 것이다. 올해만 지나면 엄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2년만 더 지나면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가정사가 험난하듯이 아버지, 누나, 그리고 나는 엄마의 포기로 박사, 석사, 석사까지 무난히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엄마가 가장 늦게 시작했지만 그 깊이는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깊을 것이다. 누구보다 절실하고 엄마의 굴곡진 인생을 통해 쓴맛과 단맛이 혼합된 가치관과 철학이 공부에 녹아들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추석 때 영화특집으로 나오고 있는'남산의 부장들'을 보다가 엄마가 갑자기 예전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아버지는 대학생이었고 엄마는 공장에서 근로하는 노동자였다고 했다. 얼핏 공부가 부족했다고 언급했는데 아버지는 엄마가 초등학교 졸업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재수 영어학원을 수강증을 줘 엄마가 애를 먹었다고 했다. 알파벳도 모르는데 학원은 끊어주니 수업은 듣는데 통 따라갈 수가 없어 힘들어 죽을 뻔했다는 거였다. 그때를 회상하면 피식 웃으며 말하는 엄마는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얼마 전에 나에게 지하철역에 갔더니 영어로 쓴 표지판을 읽고 기뻤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제 엄마에겐 영어든, 한자든 읽고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평생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공부가 엄마의 머리와 가슴에 들어온 것이다.


2박3일 간 또래친구들과 추억 쌓기는 평생 갈 추억이다. 누구에겐 너무 당연하게 갈 수 있는 수학여행이 엄마에겐 설레는 첫번째 추억 여행이다. 문득 그 추억을 너무나 쉽게 나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엄마에게 미안해졌다. 펄 벅의 '대지'란 소설을 인상깊게 읽었다. 주인공 왕룽은 땅으로 시작해, 땅으로 끝나며 그 땅을 통해 가족을 이룰 수 있었다. 그 소설을 읽고 나서 '가족'이란 존재를 생각하면 항상 '대지'란 소설이 생각이 난다.


엄마의 남에게 해코지 못하고 선하디 선한 성품과 새벽부터 일어나는 근면성실함이 우리 가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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