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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Feb 15. 2023

엄마의 중학교 졸업식

"졸업장을 보니 눈물이 왈칵 나더라"

222번째 에피소드이다.


종종 내 부모님의 관한 에피소드를 쓰는 편이다. 어느 순간 부모란 존재를 나와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하나의 자아가 있는 자연인으로서, 자녀란 행복과 고통을 준 양면적 존재에서 벗어나 그들의 삶을 찾아나가길 원했다. 김춘수의 '꽃'이란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문구를 읖조리며 가끔씩 부모 이름을 엄마, 아빠란 호칭을 거둬내고 그대로 부르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다. 평생을 누군가의 엄마, 아빠로 살기엔 자연인으로서 그의 삶이 소중하다. 부모한테서 독립하다는 건 그들을 자연인으로서 바라본다는데서 출발한다. 우리 엄마는 누군가의 엄마란 삶의 무게를 잠깐 벗어던지고 온전히 본인을 위해 뒤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중학교를 다닌지 2년째를 꼬박채웠고 중학교 졸업식이 되었다.


졸업식날, 가서 꽃다발도 주고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점심 약속을 벌써 반 친구들과 잡아놨어."라는 한마디로 거절했다.ㅎㅎ 가족들이 엄마의 또래집단에게 밀린 것이다. 대신 아빠랑 나에게 졸업축하 용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십년 전 중학교 졸업식 때, 나 역시 똑같았다. 또래집단과 놀고 싶지, 졸업식에 온 엄마와 점심을 같이 먹고 싶진 않았다. 엄마에게도 이제 일터 뿐만 아니라 학교, 공부, 수학여행이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것이다. 풍운아였던 아빠, 그리고 IMF 등으로 완전히 절망적인 집안 경제를 온전히 혼자서 지탱한 엄마이다.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에어컨도 없이 오로지 라디오 소리에만 의존하여 미싱공장에서 원단의 먼지들과 싸워 이겨낸 엄마이다. 매일 밤11시 가까이 퇴근하는 엄마에겐 나는 살가운 효자 아들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학업적으론 크게 걱정시키지 않아 손 한번 벌리지 않고 박사과정까지 다니고 있는 자랑거리 아들이긴 했다. '철의 여인' 엄마의 덕에 풍운아였던 아빠는 다시금 기회를 잡아 뒤늦은 박사 이후에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며 삶의 터전을 쌓았다. 아빠는 엄마에게 항상 미안해했고 엄마는 교수인 아빠 주변 분들이 변변치 않은 자신의 학력을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다. 내가 엄마에게 "엄마, 그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쪽팔릴 것 없는 일이니 신경쓰지마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 날 밤 누워 사색에 빠지다가 내가 오만했다는 생각에 반성했다. '가져본 자의 위선, 동정'일 뿐이다. 내가 엄마, 아니 그녀의 삶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최선을 다해 가정을 지킨 이 위대한 여성은 두려움에 몸을 숨키지 않고 뒤늦은 도전을 시작했다. 내 위선과 동정을 깊이 반성하고 엄마의 적극 지지자가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수학, 영어, 국어 등 모든 과목을 힘들어했다. 특히, 수학을 힘들어했고 영어는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컴퓨터활용 시간은 공포 그 자체였고 창고에 박혀있던 내 예전 노트북을 꺼내 타자 연습부터 가르쳤다. 엄마는 영어에 흥미를 가진 듯 했다. 지하철역 안내판 영어 몇단어가 읽힌다고 내게 호들갑 떨며 자랑해댔다. 앞서 말했듯 내겐 너무나 당연스럽게 다가온 기회, 그리고 학력이 누군가에게 평생 콤플렉스이자 염원이었다. 당연스레 가져서 '그거 막상 별거 아니에요.'라고 하는 가져본 자의 위선, 동정은 진정한 지지와 위로가 아닌 오만과 무례함 그 자체였다.


근 2년 간, 퇴근하고 돌아온 나를 잡고 엄마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때론 귀찮고, 너무 시시한 질문이었지만 내 오만을 짓누르고 엄마의 선생님을 자처했다. 중간, 기말고사 등을 치면서 엄마는 전략적 방법을 택하곤 했다. 모르겠다 싶으면 일단 문제부터 풀이방법까지 통째로 외우고, 시험을 시작하자마자 시험지에 쓰는 방식이다. 내가 딱히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그 방법으로 시험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이미 오로지 시험에 몰입한 중학생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수학여행 뿐만 아니라, 학예회 등으로 합창연습을 하고 동네 마을축제 무대에 올라 공연하기도 했다. 아침부터 얼마나 긴장하든지, 본인이 맡은 파트에서 실수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친구, 그리고 소속감, 지식과 지혜 등이 내재화되고 중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그 날 저녁밥을 같이 먹으면서, 어땠냐고 물으니 "졸업장을 보니 눈물이 왈칵 나더라."고 엄마가 말했다. 내가 속으로 엄마, 아니 그녀에게 말했다. '고생하셨네요. 강OO씨. 당신이 평생을 바쳐 펄벅의 대지를 만들어놓았고 그 위에서 나, 그리고 아빠, 누나가 싹을 틔우고 성장할 수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이제 꼿꼿이 줄기를 세우고 자란 가족 구성원들이 있으니 온전히 본인의 삶을 찾으세요. 이제 곧 고등학생이 되는데 잘해내실 겁니다."


엄마가 고등학교 졸업식엔 와도 좋다고 했다. 내친 김에 4년제 대학을 꼭 가라고 했다. "아이고, 4년제 대학을 어떻게 다녀. 전문대학을 가도 따라갈지 말지 일텐데."란 엄마의 다소 소극적인 대답에, "노노! 그냥 개돌하면 됩니다. 지금처럼만 공부하면 4년제 대학교 졸업장까지 갈 수 있을거예요." 오늘은 왠지 내 발걸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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