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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May 02. 2023

현실 속 균형잡기

삼십대 중반에 선택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일들 구분하기

237번째 에피소드이다.


상당히 오랜만에 에피소드를 기록한다. 한동안 몰려온 업무에 치이기도 했고 학업에 집중했던 점도 있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현실 속 균형잡기'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브런치 에피소드를 기록하면서 꽤 중요한 내 아이덴티티로 '로스쿨 입학'이란 부분을 다뤘으나 작년도에 철저하게 실패했다. 정확히는 '용기의 부재'다. 직장을 병행하면서 했다고는 하나 입학이 간당간당한 수준의 법학적성시험 점수로는, 입학해서 그 이후가 더 문제였다. 직장 병행은 고사하고 당장 때려치우고 올인(All in)을 한다고 해도 수년뒤의 내 모습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고정적 수입이 나오는 소속 없이 지내야 한다는 건 삼십대 중반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내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방송통신대 로스쿨이 만약에 설립이 된다면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선에서 다녀볼 수 있는 방식을 타진해볼 요량이었다. 그 이후 일반적인 Ph.D 박사과정을 선택했고 누구보다 잘 병행하면서 살고 있다. 단, 법이나 제도를 다룰 수 있는 전문자격증에 대한 갈증이 쉽게 가시지가 않아 애를 먹었다. 최근 늦깍이 의대생들이 수능고득점으로 등장하고 수없이 이직 등을 염두해 자격증 공부 열풍이 풀고 있다. 아마 다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싶다. 조금 늦었지만, 결국에는 해보자. 단, 내 현재 직장은 유지한 채로! 그 감정이 참 쉽지 않다. 직장을 그만두면 집중할 수 있겠으나, 소속감 상실 그리고 실패했을 때 연로하신 부모님, 또 내게 힘이 되어주는 아내, 자식에 대한 미안함 등이 몰려들어오기에 비효율적이지만 또는 언제 끝날지, 결국 실패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직장은 유지하며 해야 한다. 단, 하나 좋은 것이 있다면 투트랙 전략으로 고정적인 수입이 존재한다면 좀 더 마음가짐 자체는 긴장감보단 편안함(가끔 그게 독이 되기도 한다)을 유지한 채로 그 과정에 도전하고 또 도전해볼 수 있다. 플랜A,B가 있기에 나올 수 있는 기본적인 낙천적 태세전환 전략이다.


이 갈증을 해소하고자, 스스로 판단을 했고 노무사 자격증을 2년 정도를 잡고 한다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우선 난이도가 적절했고 인사,노무 이슈는 로봇이 쉽게 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기업을 창업했던 경험, 그리고 근로자로서 삶을 살아가면서 맞닿는 현실과 법(또는 제도)의 괴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꽤 컸다. 또한 논문 방향성을 ESG로 잡고 있기에 환경, 사회적, 거버넌스 3가지 축 중에서 환경, 사회적에 못지 않게 거버넌스 또한 ESG경영 실천기업으로 나아갈 수 있나를 평가하는 주요 지표가 될 것이 유력하기에 그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겸비하자는 중장기적 방향성도 방향에서 일치했다. 노무사란 전문자격으로 우월감을 차지하고 싶은 건 전혀 없다. 아시다시피 서른중반 이후 취득하는 자격증은 그저 기존 일하고 있는 분야에 플러스 알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노무사 사무실을 차려 입에 풀칠하며 버틸 수 있는 생존 마지노선이지, 우월감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뽐내기 위함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인 뿐더러, 설령 그럴지라도 나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사실, 이 모든 자체는 '생존'을 하기 위한 일환이다. 학위니, 자격증이니 하는 것들이 '폼'나려고 하는 나이는 지났다. 학과, 전공을 고려하지 않고 대학 간판을 보고 선택할지 말지를 고민했던 스무살 나이는 이미 한참 전에 떠나보냈고 현실적으로 판단해서 내가 그나마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걸 선별하고 단기, 중기적으로 임팩트있게 집중하는 환경조성과 실천습관을 기르는 것이 유일하게 '생존'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 확신했다. 다만, 하나 아쉬운 건 이 고민이 길어져서 올해 1차 시험을 쳐볼 수 있는 시기를 놓쳐, 내년도에 1차 시험을 쳐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책으로 완전히 매칭은 안되지만 하반기에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유사시험으로 대체할 예정) 무튼, 5월로 결심이 섰고 또 난관을 헤쳐가는 길 뿐이다. 사실 용기는 왜 그렇게 쪼그라들었는지 의문일 정도로 쫄보 겁쟁이가 되었다.


내 스스로 겁쟁이, 쫄보라는 걸 인정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언가 손에 잡히면 다 해낼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이십대의 난 이미 없어져버렸다. 다만, '생존'을 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바꾸고 해낼 수 있는 것을 빠르게 확인 후 실천하는 일종의 '메타인지'는 살아있었다. 삼십대 중반에 선택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일들 구분해나가면서 끊임없이 '현실 속 균형잡기'를 실천할 것이다. 그 이유는 대의도 없고 명분도 크게 없으며 너무 멋없지만 그저 '생존'하기 위함이다. 개인주의자로 '개인의 자유'를 폼나게 지키는 건 그 다음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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