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커피 한잔의 여유 Aug 06. 2023

광기의 시대, 칼부림

본인 열등감의 잘못된 표출, 다수의 피해가 만족을 주는 비정상적인 욕망

252번째 에피소드이다.


내가 아끼는 지인들의 스케줄을 알게 되면, 잠시 'oo역 칼부림 예고'를 검색해보고 혹시나 동선이 겹칠 여지가 있다면 지인에게 알려주느라 여념이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그러하다. 죽는 자체가 보다도 그렇게 죽거나 상해를 입으면 개죽음 그 자체이기에 최소한 내 지인에 한정해서 만이라도 미연에 방지하고 싶다. 또 한가지 감정은.. 솔직히 말해서 너무 찌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다수의 피해가 본인에게 만족을 주는 비정상적인 욕망 그 자체가 너무 찌질해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다수의 피해가 동반되는 칼부림은 현재 자체가 광기의 시대인 것을 방증한다. '더 퍼지'란 영화가 있다. 365일 중 한 하루는 법이 없는 어떠한 범죄도 허용된 광란의 날이다. 이를 통해 타노스가 하고자 했던 인구 청소 뿐만 아니라, 다수가 기득권층에 품고있는 불만을 일시적이나마 해소시키며 시선을 돌리고자 한다. 물론 상류층은 보디가드를 고용해 안전을 보장받으며 이때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하층민들, 또는 보복범죄의 타켓이 되는 이들이 공격받거나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광기의 시대, 수없이 살인예고 글들이 올라오며 마치 '더 퍼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나는 국가를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다. 내게 헌신적일 꺼란, 또는 항시 기대를 충족해줄 꺼란 전제조건을 걸지 않고 국가를 바라본다. 개인주의자답게 내 성장과 발전에 국가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만 고민한다. 다소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그게 결과론적으론 더 낫다. 실제로 내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만큼 세금으로 또 그와 준하게 기부, 기여 등으로 내가 이룬 성과에 대한 커미션을 내는게 국가와 개인의 서로 간 더 이득이다. 즉, 본인 스스로가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운이 좋게 인권이 말살된 북한보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 그 자체만으로 만족한다면 또 개인은 국가의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될놈될~ 이란 말처럼 될놈은 어느 국가에 태어나더라도,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그 노력을 알아봐주는 귀인을 만나 성공하고야 만다. 미국에 태어나도, 싱가포르에 태어나도 그 자체로 만족하는 개인은 큰 성공을 못 이루고 실패하고 만다. 얼마 전, 프린시스 은가누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현존 최강의 격투선수로 불리는 그는 최악의 환경인 카메룬에 태어나 오로지 스물여덟까지 막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해왔지만, 자신이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고자 프랑스로 이민을 택한다. 거기서 기회를 잡은 은가누는 지금의 은가누가 되고 만다. 은가누가 실제로 나중에 어떠한 격투선수로 남을지, 아직은 미지수지만 최소한 그 개인의 우뚝, 바로 서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누구보다 개인을 의지했고 믿었으며 가족이란 나를 평생 믿어주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고 노력했다. 이 곳에서 국가는, 사회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열등감의 표출의 시작은 본질적으로 개인에서 시작한다. 그 타켓이 사회의 불만으로 이어지는 건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그 사회의 불만의 타켓이, 불특정다수라는 점은 더욱더 찌질하다는 감정을 지울 수가 없다. 전혀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고 그저 병신력을 증명해가는 길이다.


칼부림 사건 등을 접하면서, 만약에 내 앞에서 또는 내 지인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나는 어떻게 행복할까를 꽤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내 앞에서 사랑하는 또는 아끼는 지인이 누군가에게 칼에 찔린다면,, 나는 내 스스로를 그 뒤에 통제할 자신이 없다. 위에서 말한 그 복잡한 감정선이 한꺼번에 들어와,, 두려움보다 더 큰 역겨움을 느낄 것 같아 스스로 무섭기까지 했다. 왜 내가 사랑하는 또는 아끼는 지인이어야만 하는가, 그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데 그러한 피해를 입어야 하는가, 나는 도저히 납득하기가 힘들다. 만약에 그걸 즐기는 비정상적인 욕망을 표출하는 이라면, 솔직하게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열등감의 진원지를 어디서 충족시키려고 갈구하고 있는지 말이다. 개인이 무조건 바로 서야만 한다. 쉽게 말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이 꼰대스럽고 더럽고 치사한 말인 것 나도 매일 느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것 밖에 방법이 없다. 열등감의 표출을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챌린지하고, 좌절하고 실망하지만 다시금 부여잡고 일어서려는 노력, 그것밖에 없다. 

작가의 이전글 '개인'의 범위가 존중되지 않은 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