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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Nov 03. 2023

변덕쟁이가 된 아버지

세브란스 병원에서 휠체어를 끌고 하루종일 함께 한 하루 

262번째 에피소드이다.


아버지의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 건 올해 초부터이다. 무릎의 문제라 치부하고 수술 후 재활하면 낫겠지하는 나이브한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한 건, 재활 중 이석증이 찾아온 순간부터이다. 아침부터 119 구급차를 불러 실려가는 아버지를 보곤 '이건 뭔가 잘못 되었다.'고 느꼈다. 아버지는 무릎 수술 후 빨리 낫지 않은 다리를 보며 더욱더 재활에 매달렸지만 나아지지 않아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걸음이 불편해지다보니 멍하니 혼자 의자에 앉아있는 경우가 많았고 심정으로 약해져갔다. 무릎이 문제가 아니라 허리 신경이라 발견한 건 10월 남짓이었다. 점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얼마 걷지도 못하는 양상이 전개되면서 MRI촬영을 억지로 찍고 난 후였다. '억지로'란 표현을 기술한 건 아버지가 호전되지 않은 상황을 설명해도, 재활중이니깐 그런것이다라고 치부한 지역 의료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함을 밝힌다. 아무튼 갑자기 급전개가 되면서 무릎이 아니라 허리 신경이 문제라 인식하고 들여다보니 척수종양이 이미 만연한 상태였다. 누구탓을 따지기보단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하는지 정신을 가다듬고 세브란스 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상당히 힘든 수술이란 것으로 의견들이 모아지자 가장 심란한 건 아버지였다. '노시보 효과'가 일어나듯 실제로 상황을 인지한 순간 아버지는 급격히 흔들린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 하려고 했지만, 통증과 함께 우울감이 밀려온 듯 했다. 병원예약을 잡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내게 서울로 가는 방안 중 가장 편한 방법을 고민해보라했고, KTX 가족석 또는 특실을 활용하자는 의견을 냈다. 이동시간이 짧은 비행기를 타고 가자는 어머니의 의견도 있었지만 김해공항과 김포공항을 왕복하는 건 무리하게 보였다. 부산역까지 도착해 어떻게 기차 플랫폼까지 이동해 무사히 탑승하냐는 물음에, "그냥 조금씩 걸어가면 되죠"라는 다소 공감이 떨어지는 발언을 해버렸다. 엘리베이터가 어디있는지 알아보라는 어머니의 물음은 배리어프리(Barrier-free)의 의미와 중요성을 역설해왔지만 정작 난 부산역 기차플랫폼에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네이버지도를 통해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하고 아버지를 안심시킨 뒤, KTX특실을 티켓팅하겠다고 말하고 아버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결재버튼을 눌렀다. 이제 며칠 뒤면 아버지는 서울 병원으로 가게 된다.


그 며칠은 아버지에겐 굉장히 심적으로 힘든 시기였나보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갈등이 생겨, 비행기가 더 편한지 아닌지를 알아보라고 요청했고 어머니는 직접 부산역을 가서 엘리베이터 위치를 다 체크해보자는 의견을 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행위가 급속도로 힘들어졌는지 두려움과 함께 용기가 필요한 시기였다. 결국 그 전날 아버지는 변덕쟁이가 되고 말았다. 아는 지인을 통해 수고비를 주고 대형 카니발로 운전해 서울을 갔다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아니, 부산-서울 왕복이 장장 10시간은 족히 걸릴텐데 KTX기차가 더 낫지 않을까요?"란 내 물음에, 아버지는 "계단 오르고, 내리는 것 자체가 지금 상당히 힘들다."라고 본인의 상황을 담담히 설명했다. 세브란스 병원은 항상 만원이다. 대한민국 최고 의료기술의 집적체이기에 대기줄은 상상을 초월하며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분리해 KTX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먼저 도착해 아버지가 부산 대학병원에서 촬영했던 CD를 미리 구워 사전접수 형식으로 행정처리를 해놓는 일을 담당했다. 그래야 조심이나마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얼추 다 정리가 되자, 아버지가 병원 내 휠체어를 타고 도착했다. 그때부터 진료, 수술일자 등 조정, 몇가지 검사 진행을 위해 병원 내를 종횡무진 휠체어를 끌며 다녔다. 부산-서울의 한계가 있기에 오늘 할 수 있는 건 오늘 반드시 모두 처리하고 가야하는 특명이 내겐 있었다. 그나마 좋은 시나리오로 수술일자, 검사도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다 끝나니, 시계는 오후6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의사분들은 퇴근, 그리고 내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휠체어를 밀면서, 크게는 두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이제 더이상 예전처럼 힘차게 뛰시진 못하겠구나, 그리고 내가 자식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개인으로서의 나,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로서의 나, 두가지가 공존하는 존재이기에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걱정을 넘어 내 역할과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공존했다. 나 역시 누구보다 두려움과 함께 용기가 필요한 시기였다.


수술은 낫기 위한 수술이 아니라, 현상 유지를 위한 수술이고 수술 이후 꾸준히 재활을 하더라도 더 좋아지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다. 반년 간 또 힘겨운 재활로 아버지는 '생의 감각'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그간 봐왔던 아버지는 '생존왕'이었고 '징글징글하다 못해 손사래치며 도망가게 한 버티기 달인'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그 누구보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일거다. 나는 내 스스로를 겁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IMF 이후 아버지와 어쩔 수 없이 따로 떨어져 살며, 일종의 단칸방 형태에서 어머니와 같은 방을 쓰던 시기였다. 사춘기였지만, 내 방이 없던 난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미싱공장 일을 마친 어머니가 밤늦게 오고 난 뒤 잠자리에 들곤 했는데 그날은 새벽에 잠시 잠에서 깨버렸다. 내가 그때 마주했던 건 어머니가 혼자 새벽에 흐느껴 울던 모습이었다. 경제적으로 힘든 그 상황은, 누구나 강하려고 노력했지만 대부분은 약했다. 그때의 어머니에겐 새벽이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난 그것을 봤지만 벌떡 일어나 "엄마, 괜찮아"라고 안아주며 위로해줄 용기가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모른척하며 눈을 감고 다시 잠에 드는 것 뿐이었다. 그 이후로 어머니가 나를 양육하며 헌신하는 존재가 그저 한명이 인간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렇듯이, 아버지도 오늘 내게 한명의 인간으로 인식되었다. 어머니보다 같이 산 세월이 그리 많지 않다보니 그걸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이전과 달라진 건 모른척하며 눈을 감고 다시 잠에 드는 걸 택하지 않고, 그를 힘껏 안아주며 "괜찮다. 수술 잘 끝내고 재활을 하면 가장 최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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