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 순 있다. 다만, 그때도 정말 힘차게 앞으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떴다가 깜짝 놀랐다. 시계는 아침7시2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랫동안 풀코스 마라톤, 풀코스 마라톤을 외쳤으나 오전8시5분경에 출발하는 jtbc 서울마라톤에 난 늦어버렸다. 서울까지 온 보람이 없어졌고, 허무했다. 전날 밤에 서울에 도착해 숙소에서 옷이며, 보충간식, 보호대 등을 전부 꺼내놓고 잠에 청했는데 새벽1시 넘게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알람을 6시에 맞춰놓았는데 그 소리를 희안하게도 전혀 듣지 못했다. 앉아서, 5분여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 숙소는 내 지인 소유의 건물이라 가방을 들고 마라톤 현장에서 짐을 맡겨야 한다는 점을 배제해도 되었다. 내가 늦었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풀코스의 경우, 출발점과 도착점이 완전히 달라 짐을 오전7시30분까지 맡겨야, 짐 차가 출발해 무사히 그 도착점에서 짐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냥 몸만 갔다가 다시 여기로 와서 씻고 짐을 챙겨가면 된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어제 잠들기 전 꼼꼼한 준비정신이 빛을 발휘했다. 슥슥, 그대로 옷을 입고 최소한의 짐만 챙겨 달려나가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님은 내 복장을 보자마자, "마라톤 뛰러 가시나 봐요."라고 물었다. "네,, 근데 제가 늦게 일어나서 정말 놀라서 뛰어나왔어요. 풀코스 뛰기로 했는데,, 허무하게 출발도 못할 생각은 끔찍하더라고요." 다행히도 택시 기사님은 마라톤 동호회 출신이셨고, 누구보다 공감하며 기록보다 풀코스 자체를 완주하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출발점 가장 최적화된 경로에 나를 내려주셨다.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사실 어제 비가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순간 멍해졌다. 비가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뒤덮었지만 그건 어찌보면 하나의 합리화에 불과했다. 내가 완주할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결과에 대한 미리 스스로 나를 단정짓고 합리화하는 복선의 시작이라 마음을 다 잡았다. 봉투에 쌓인 우비를 챙겨갔지만, 출발시간까진 비가 내리지 않았다. 뒤늦게 간 만큼 몸 푸는데 최선을 다해 집중했다. 곧 출발신호가 울리고 내 생애 첫 풀코스 마라톤은 시작되었다. 나름 초기 페이스는 괜찮았으나, 10km 이후 빗방울이 굵직해지면서 죽음의 레이스가 되었다. 그 피로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30km 내외까지 약 20km 를 비 맞으며 달리는데 초주검이 되었다. 신발은 온통 빗물에 젖어 질퍽했으며, 비바람이 부니 시야가 가려진 얼굴을 닦아내는데 여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정말 이때가 고비였고 '포기해야겠다. 이 정도면 누가 끈기없다고 핀잔주진 않겠다.'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사람이 정말 신기한 건 그래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보다 코스 옆으로 빠져서 중도포기 또는 휴식을 취하는 일부 사람들이 더 잘 보인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러고 싶었는지 모른다. 정말 이 유혹을 참는 것이 어려웠다. 28km 지점부터 소위 발바닥이 아작이 난 것 같았다. 그곳부터 도저히 뛰지 못할 정도로 발바닥에 통증이 왔다. 뛰는 걸 멈추고 걸었는데, 너무 자존심이 상해 스스로 입에서 욕이 나왔다. 알다시피 걸으면 무조건 천천히 뛰는 것보다 현저하게 느려진다. 이를 악물고 빠르게 걸으려고 했다. 한걸음이라도 좀 더 빨리, 빨리 걸으며 뛰는 것과 엇비슷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36km지점까지 5백미터를 걸다가, 5백미터를 정말 이를 악물고 뛰는 걸 반복했다. 걷다가 달릴 때가 되면, 왼쪽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걷기조차 힘들었는데 앞서 말했듯 너무 자존심이 상해 통증을 참는 고함을 치며 달리길 반복했다. 36km에서 운좋게도 4시간50분 페이스메이커 분의 그룹과 만나게 되었다. 즉, 나는 점점 초반 페이스를 잃으면서 뒤쳐지고 뒤쳐져 이 그룹과 마주한 것이었다. 4시간40여분의 완주는 정말 내 스스로를 과신한 목표였다. 오글거릴 수도 있지만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를 계속 되뇌이며 그 페이스메이커 분의 그룹에 빠짝 붙어 달렸다. 6km 넘게 달릴 요량으로 정말 이를 악물었으나, 39km를 지나며 내 다리를 완전 아작이 나고 말았다. 이제 더는 달릴 힘조차 없어 그저 페이스메이커 분의 그룹이 멀어지는 걸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때부턴 그냥 걸었던 것 같다. 뭐 어떤 생각조차 안나고 기록이야 어쨋든 꼭 완주는 하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걸을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걷고 또 걸었다. 아무 생각이 안나며 그냥 앞만 보고 걷다가 42km 표지판이 저 앞에 보였다. 5백미터 정도만 더 뛰면 42.195km를 완주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렇게 나는 결국 완주하고 말았다.
기록은 4시간 58분 6초
5시간 이내에 들어와야, 기록을 측정받을 수 있기에 한편으론 아쉬움과 함께 안도감이 나를 감쌌다. 완주한 뒤 주는 물과 간식을 그냥 퍼질러 앉아서 먹기에 바빴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기진맥진 그 자체였다. 매일 러닝머신 5km를 뛰며 하프마라톤 2번을 2시간에 문제없이 완주했다는 자신감으로, 참가한 내 생애의 첫 마라톤은 진짜, 정말, 너무 힘들었다. 단순 거리의 2배가 아니라 그 힘듦은 비교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 이후 숙소로 돌아와 씻고 그대로 다시 뻗어 저녁까지 잠을 청했다. 꿀잠 그 자체였다. 저녁에 일어나 혼자 삼계탕을 먹는데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미친짓을 했구나' 싶은 생각이 계속 맴돌기만 했다. 하지만 풀코스 마라톤 완주를 해본 자만이 가져볼 수 있는 하나의 여유이자, 낭만이긴 한 듯 하다. 그래, 난 완주를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