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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Apr 12. 2021

엄마에 대한 단상

선거기간, 그리고 엄마. 그래서 더 소중한 시간

예순여덟번째 에피소드다.


오늘은 선거기간 중 엄마가 아프셔서 한 고찰을 정리하고자 한다. 페이스북(SNS)을 통해서 그 순간을 감정들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3가지 짧은 에피소드를 나열해보면서 엄마에 대한 내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수술 후>

전신마취 수술을 끝내고 최소 6시간은 잠을 자면 안된다고 했다. (의학지식이 없어서 왜 그런지는 정확히 모른다) 아버지랑 교대해서, 엄마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절대 잠들지 않게 계속 말을 걸었다. 엄마가 힘없이 재미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냐 그랬더니 꼬마 때부터 지금까지 이야기를 해달라 했다. 기억을 더듬어 꼬마 때부터 재밌었던 에피소드 위주로 말을 했다. 그 집에 살때, 옆집에 누가 있었고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래서 다른 집으로 이사갔고 그때는 참, 재밌었기도 했는데 힘들었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집없는 떠돌이 생활을 할때로 귀결했다. 한참을 듣다가 "엄마가 참 열심히 살았다. 그렇지?" 라고 했다. 속으로는 '그럼요. 열심히 사셨죠'라고 크게 말했지만 들릴듯 말듯 작게 겨우 입밖으로 꺼낸다. 연대기 순서대로 말하다가, 가족이 잠시 따로 살 때가 기억이 나서 "그.. 그.." 계속 말을 못 이어간다. 어느덧 이야기가 중,고등학교때로 넘어온다. 그때만큼은 자신있게 "아! 내가 그래도 중고등학교 때는 효도 많이 했지. 공부 잘해서 성적장학금 맨날 받아 왔잖아요." 뿌듯하게 말한다. 엄마가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내가 그때 말을 잘 못해서.. 너가 장학금 한번 못 받았어. 미안했는데.."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건데 생각해보니 고1때 엄마는 아버지가 시간강사인데 대학에 있다고 하니 그쪽에서 정식교수라고 생각해서 장학금에서 배제된 적이 있었다. 학기마다 장학금은 받았던 것 같은데, 수많은 장학증서보다 한번 자기 자신이 잘못 말해서 내가 장학금 못 받은 것이 평생 마음에 걸렸나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이 착하디 착한여자가 나를 낳고 얼마나 열심히 꾹꾹 참으면서 살았는지 이해가 갔다. 


엄마와 함께했던 32년이란 시간을 6시간에 압축하기에는 참 그 시간이 짧았다. 그 시간이 참 고즈넉하다. 



<외박>

가족 모두가 함께 한 24시간.

아침부터 엄마가 부산스럽다. 병원에서 외박을 1일(24시간)주었고 어제 누나가 경기도에서 내려왔다.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 입원하기 전까지 엄마가 해야될 일은 많다. 아침부터 한동안 아버지가 먹을 반찬준비, 그리고 세탁기 사용법, 널어놓은 빨래를 개어두기, 고장난 보일러 고치기로 정신이 없다. 아버지는 세탁기 사용법을 옆에서 배우는 중이고, 나는 집 앞 마트에서 물부터 간식거리를 사다가 쟁여놓고 있다. 누나는 설거지와 청소를 하면서 일손을 거들고 있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은 우리 엄마가 평생토록 가족을 위해 해왔던 일이다. 엄마는 잠시 잠깐, 자기가 이 자리를 비워야한다는 사실에 걱정이 되어 아침부터 난리가 난 것이다.


가족이란 공동체가 주는 의미를 새삼 느낀다. 

우리 가족은 살아오면서 여러가지 힘든 일들로, 같이 산 적이 별로 없다. 재개발 지역에 사글세로 살다가 산에서 큰 돌이 굴러내려와 부랴부랴 이사간다고 정신이 없었고 유년기에는 실력은 있으나 유독 운이 없었던 아버지가 함께 있지 않았고, 성인된 후에는 나와 누나가 각자 살 길을 찾으러 간다고 함께 살지 못했다. 내가 25살 무렵, 아버지가 전화가 와서 "XX날은 무조건 시간 비워. 가족여행을 한번도 못갔으니 이번에는 꼭 가자"라고 해서 제주도 예약을 다 해놨다가 누나의 첫 조카 임신소식에 싸그리 취소된 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가족 모임의 기억이다. 이번에 엄마의 소식으로 일단 만사 다 제쳐두고 모두가 모여 이야기할 수 있는 24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집'이 가족에게 주는 의미는 대단하다.

우리가족은 사글세, 전세를 전전하다가 내가 스무살 넘어 오래된 24평형 작은 아파트를 처음 장만했다. 작은 방 3개에, 거실이 있는 이 곳에 이사를 준비하며 우리엄마가 힘든 줄도 모르고 싱글벙글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평수에 상관없이 가족이 이제는 다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데 기뻤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엄마는 건장한 사춘기 남자가 자기 방 없이 항상 엄마랑 같이 한방에서 자야하는 것에 미안함을 가졌다. 그래서 아파트로 이사가며 내 방이 생겼을 때, 그렇게 기뻐했다)

어제, 오늘 이 24시간에 '집'이 '집'다운 일을 했다.

 


<설날>

엄마가 없는 설날

우리 가족은 개인 플레이를 주로 하기에 격식차린 집안행사도 없었지만 항상 집에서 아침은 같이 먹었던 것 같다. 올해만큼은 한명의 빈자리가 크다. 병원에 엄마를 보러 가서 설날을 보낸다. 곧 항암 치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체력을 잘 길러야한다고 신신당부를 드리고 온다. "설날은 그렇게 지나간다."


집안의 질서는 대혼란이다.

나눠먹을 음식 마련, 음식물 재활용 쓰레기처리, 청소 및 설거지, 문고리 교체 등 일련의 일들은 능숙하지 못하게 꾸역꾸역 이루어진다. 넷이었던 가족이, 누나의 결혼으로 다섯으로 늘었다가 두명의 조카가 태어나며 일곱으로 늘었다. 월세였던 집이 전세가 되고 마침내 자가가 되어 우리 가족만의 공간이 생겼다. 그 성공의 주역이 잠시 이번 설날에는 여기 그가 세운 공동체의 자리를 비웠다. 


그 빈자리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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