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커피 한잔의 여유 Sep 22. 2021

이타적 개인주의자 선언

나는 상호호혜적 개념을 이해하는 개인주의자

아흔번째 에피소드이다.


우선 오늘은 추석당일이다. 하지만 고요하다. 독립한 누나가 가족을 이루고 매형, 조카들과 함께 잠시 왔다가 가는 것 이외에는 일절 다른 가족행사는 없다. 핵가족화의 전형으로 우리 가족은 어느 순간부터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집에 남겨두고 "텃밭에 갔다가 저녁 먹고 올테니 알아서 밥 챙겨먹어!"하며 집을 나섰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스스로를 정의내리지 못했다. 나를 깊게 알아온 사람들이 내게 보인 의외의 반응은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지 몰랐어."였다. 대외적이며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일들을 했던 내가 극도로 혼자 있고 싶어하고 혼자 모든 것을 해내고 책을 보며 공상에 자주 빠진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란다.


이건 백이면 백 모두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랬다. 공상에 빠지길 좋아하고 누군가와의 약속이 즐거움보단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적이 많았다. 그래서 항상 '정말 저 말이 진실일까?'라고 생각한 상투적 표현이 있다. 누가 자신이 좋아하는 점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어필할 때마다 나는 그 진위를 의심했다. '나는.. 그러기 싫은데 혼자 그냥 있고 싶은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는 확언할 수 있다. "개인주의자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몇가지 있다. 우선 어느 정도 선이 있다. 나와 같이 일한 동료들은 내게 학을 뗀다. 일은 냉정하고 무서우리만큼 잘하는데 살갗게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자세히 말해달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회식을 말한다. 회식을 가는데 밤10시가 되면 무슨 신데렐라마냥 딱! 가방 싸고 안부+술 값을 1/N로 해서 현금(또는 카카오페이)로 전달해놓고 "안녕히 계세요. 내일 뵙겠습니다."하면서 일어선다. 처음엔 내가 상당히 오해 받았지만 계속 반복되니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내가 그러한 이유는 '운동'하기 위해서다. 그때 밤11시에 문을 닫는 헬스장 등록을 해놨는데 '30분이라도 운동하자'는 마인드가 있었다. 그 시간은 나한테는 굉장히 소중했고 그것을 '회식'과 완전히 맞바꾸기는 싫었다. 어느 정도 합리선을 맞춘 것이 밤 10시다. 또 한가지는 어느 시간을 넘어서면 절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은 쉬는 공간, 사무실과 밖은 일하는 공간으로 규정해놓았다. 집에 오면 일체 일을 하지 않는다. 만약 정말 급한 일을 해야 한다면 노트북을 가지고 카페에 가서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무조건 쉬거나 논다. 그게 내 인생의 철칙이다. 그러다보니 전화도 안 받는다. 어쩔 수 없다. 나와의 신뢰를 쌓은 분이라면, 이해해줄 것이라는 판단 또는 필요하면 내일 또 올꺼라는 배짱 등이 어울어져 있다. 밤새 핸드폰을 붙잡는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을 누락시키거나 미룬 적은 한번도 없다. 지독시리 철저해서 캘린더에 기록해두고 Dead Line, 최소2일 전에는 확인시켜줘야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나는 '워라밸'보다는 '내 할 일은 이 악물고 해낼테니 끝나면 나 건들지마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다.


문유석 작가의 '개인주의자 선언'의 책을 읽고 내가 생각하는 개인주의자에 관한 견해를 정립했다. 작가는 '자신의 개인주의자이지만 개인적인 일에 완전히 몰입되어 공동체가 무너지면 내 개인의 자유 또한 무너질 수 있으니 적당히 내어주어야 한다는 면이 있다.'고 표현했다. 내가 해석상의 문제가 없다면 나와 완전히 일치한다. 나는 '개인주의자'이지만 상호 호혜적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기업, 마을공동체, 그리고 국회에서 그러한 개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직업적으로 일했다. 쉽게 말하면, '나'란 개인을 지키기 위해서 공동체를 생각했다. 그래서 특강을 가, 대부분 받는 질문인 "어떤 심정으로 사회적기업을 창업하셨어요?"에 "전 그냥 제 눈 앞에 있는 그 꼬라지가 너무 보기 싫었어요. 저는 착한 사람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그게 다 예요."라고 굉장히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지만 그게 전부인 것 같다. 상호 호혜적 개념을 이해하고 내게 주어진 개인, 그리고 자유를 만끽하고 유지하기 위해 가끔은 내 눈에 보이는 공동체의 붕괴와 균열을 바로 잡는다. 그게 나다.


난 그런 부류의 '개인주의자다.'

작가의 이전글 사회적기업의 불편한 현주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