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프랑스에서 잘 나가는 증권업자였던 폴 고갱은 자신이 진정 바라는 삶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남태평양에 작은 섬 타히티로 떠나게 되죠 태곳적 자연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을 줄 알았으나. 그러나 이미 오래전 프랑스 식민지로 전락한 탓인지 타히티 원주민의 삶은 이미 식민지배로부터 파괴되어 오염되어 있었고, 혼혈을 기울인 그의 작품들은 사람들로부터 냉소받았으며, 성과 음주 등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 병든 몸과 정신으로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함께 절대 놓지 않았던 질문은 결국 지금의 고갱을 만든 역작을 탄생시켰어요.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평생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고민이 반영된 것이었죠. 이 작품이 고갱을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로 올려놓게 된 이유는, 이 질문이 고갱이라는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찾아 헤매고 있는 질문과 같기 때문일 거예요.
고갱이 이 작품을 그려낸 시기는 19세기 후반. 증기기관의 발전으로 시작된 산업 혁명,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는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사회가 한 차례 진화하는 ‘근대화’(Modernization)로 이행하는 시기였습니다. 나를 둘러싼 사회의 모든 것이 혼란으로 뒤섞이는 시기를 지나며 나의 주체성을 고민하는 시기기도 했고요.
근대화의 의미는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변화된 시기를 의미해요. 근대화의 이론을 정립한 사회학자 중 한 명인 탤컷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 ~ 1979)는 우리의 사회체계가 네 가지 차원으로 기능한다고 분류해요. 1) 첫 번째는 하나의 역동적 환경 안에서 자원을 창출하는 ‘적응(Adaption)’, 2) 행위 목표들을 확정 짓고 관철시켜야 하는 ‘목표달성(Goal Attainment)’, 3) 연대가 형성될 수 있도록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는 ‘통합(Intergration)’, 4)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하기 위해 통일된 가치로 안정시키는 ‘유형유지(Latent Pattern maintenance) 또는 구조유지’의 기능이죠.(각 앞글자를 모아 AGIL 도식이라 부르기도 해요.) 이 이 어려운 차원을 우리 삶과 가까운 개념들로 바꿔 말해 본다면, 적응은 경제제도, 목표달성은 정치제도, 통합은 법 또는 교육제도, 유형유지는 문화 또는 종교제도로 이해할 수 있죠.
그런데 근대화에는 유념해야 할 점이 있어요. 바로 4가지 차원이 모두 균형 있게 발전되어야 한다는 점인데요. 어느 한 차원에만 발전이 이뤄지고 나머지 차원은 정체하게 되면 영역의 불균형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불균형은 결국 사회의 역기능을 불러오게 될 수도 있죠. 파슨스는 과거 독일이 민족사회주의로 잘못 발전된 원인을 불균형에서 착안합니다. 몇몇 영역은 너무 빨리 발전한 반면 다른 영역은 너무 느리게 진행되어 사회병리가 발생했다고 진단했죠.
한스 반 더르 루(Hans van der loo)와 빌렘 반 레이엔(Willem van Reijen)은 탤컷 파슨스의 이론에 기초해 새로운 해석으로 사회체계를 구분했는데요. 1) 도구적 이성을 활용해 자연을 지배하는 ‘길들이기’, 2) 모든 영역을 합리적으로 계산·예측·지배하려는 시도인 ‘합리화’, 3) 심화되는 분업과 경제, 학문, 예술·종교 영역에서 일어나는 기능과 가치의 ‘분화’, 4) 인성의 변화 및 인간 행위와 관계에서 발생하는 ‘개인화’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들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잘 아는 과학기술들을 분류해 보면 더 쉽게 다가올 수 있을 거예요.
자연을 길들이려는 시도는 1) 환경/에너지 차원에서 원자력(Nuclear fusion/fission), 풍속에너지(Wind Energy), 태양열에너지(Solar Energy), 바이오에너지(Bio Energy), 탄소포집(Carbon Capture) 등이 해당될 수 있어요. 그리고 2) 생물 공학(Biotechnology)/건강관리(Health Care) 차원에서 DNA 데이터 저장(DNA data storage), 장기유사체(Organoid), 유전자 편집(Gene editing), 안티에이징(Anti-ageing),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 등도 포함될 수 있고요. 마찬가지로 3) 농업/식량의 차원에서는 농업 기술(Agriculture Technology), 배양육(cultured meat) 등이 포함될 수 있겠죠.
합리화는 체계적, 과학적 또는 데이터 기반 접근법이 필요한 영역이에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데이터과학(Data Science), 자연어 처리 과정(Natural Language Processing),
양자컴퓨터(Quantum Computing), 유통(Logistics) 등이 해당될 수 있겠죠.
분화는 법,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기능들을 분절적인 상태로 만드는, 즉 각자의 영역들이 점차 전문화되어 잘게 쪼개지는 것을 의미해요. 예를 들어 노동/생산의 측면에서는 생산 자동화(Manufacturing automation), 웨어러블 로보틱스 & 협동로봇 (Wearable robotics & cobots)으로 인한 노동/생산구조의 변화가 해당돼요.
개인화는 개인의 행동이나 선택 또는 경험과 밀접하게 연결된 영역이에요. 나아가 개인과 개인들의 상호관계를 포함할 수도 있고요. 통신 기술(Communication Technology) 차원에서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 5G,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 스트리밍 서비스(Streaming Services) 기술 등이 해당될 수 있어요.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 IT), 교육 기술(Educational Technology)도 해당될 수 있고요.
이 매거진에서는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과학기술들이 어떻게 사회를 추동하는지 네 가지 차원에서 분류/분석해 보는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가볼 예정이에요. 특정 기술이 어느 차원을 더 진화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지 혹은 지나치게 느린지 등을요. 물론 분류가 완전히 정확하게 들어맞다고는 장담하기 힘들어요. 예를 들어, 운송수단 기술(Vehicle Technology)은 탄소 배출을 줄여 환경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길들이기의 영역으로 볼 수 있지만, 효율적인 이동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합리화의 영역에도 걸쳐있을 수 있겠죠.
약간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하지만, 파슨스와 한스 반 더르 루, 빌렘 반 레이엔의 이 복잡한 시도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추동과정을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알기 위한 작업의 결과였어요. 마찬가지로, 지금도 쏟아져 나오고 있는 과학기술을 기술이 어떤 차원에 해당되지는를 분석해 본다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통제가능한지를 알 수 있게 되겠죠.
[위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D' où Venons Nous / Que Sommes Nous / Où Allons Nous, 1897)>
[도서] 하르트무트 로자 외, <사회학이론>, 한울아카데미, 2015. 12. 30.
[논설/기사] 고갱과 루이스 캐럴의 질문, 김준영, 크리스천 투데이, 2018. 7. 27.
[연구보고서] Game-changers-in-science-and-technology(2023), TechnologicalForecasting
[논문] 김광기.(2007).탈코트 파슨스와 근대성.한국사회학,41(1),256-287.
[논문] 석관.(2018).산업혁명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과학기술정책,1(1),113-141.
[논문] 송성수.(2017).산업혁명의 역사적 전개와 4차 산업혁명론의 위상.과학기술학연구,17(2),5-40.
[논설/기사] What Are The Types of Technology?, Simplelearn, 2023.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