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1: 기억 속의 상처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희미하게 들리던 엔진 소리마저 아득해지더니, 이내 모든 것이 암전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간신히 눈을 떴지만, 시야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조차 분간할 수 없는 완벽한 어둠.
축축하고 차가운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딱딱하고 거친 바닥의 감촉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손목과 발목을 옥죄는 거친 밧줄의 감각이 뒤늦게야 신경을 자극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묶인 사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주면 줄수록 밧줄은 살을 파고드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숨이 가빠왔다. 공기는 눅눅하고 퀴퀴했다.
곰팡이 냄새인지, 낡은 흙냄새인지 모를 역한 냄새가 폐 속 깊이 파고들었다.
‘으음... 몸이... 움직이지 않아. 여긴 어디지?’
“누구 없어요?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목청껏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메아리는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몇 번이고 부딪히다 이내 힘없이 사라졌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한 적막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지만, 공포는 이미 이성을 마비시킨 뒤였다.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 기억은 대리 기사가 건넨 생수였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을 때 느꼈던 묘한 씁쓸한 뒷맛.
그리고 파도처럼 밀려오던 졸음.
틀림없었다.
그 물에 무언가 섞여 있었고, 그것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 터였다.
섬뜩한 배신감과 함께 그 대리 기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친절하게 웃어 보이던 그 얼굴 뒤에 이런 악의가 숨어 있었다니.
'도대체 왜? 무슨 목적으로 나를 납치한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장기 밀매? 아니면 돈?
장기 밀매라면 이해가 가지만, 돈 때문이라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셈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내가 가진 것이라곤 쥐꼬리만 한 월급과 낡은 차, 그리고 허름한 아파트 한 채뿐이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고, 빚은 아니더라도 여유롭지 못한 삶이었다.
이런 나를 납치해서 얻을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불안감이 점차 공포로 변해갔다.
약 기운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 몸의 감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동시에 불안감도 더욱 또렷해졌다.
그때였다.
"끼익—"
낡은 쇠붙이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녹슨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좁은 틈새로 한 줄기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빛을 등지고 건장한 남자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검은 복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넉넉한 체구와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젯밤 나에게 생수를 건넸던 바로 그 대리 기사였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당신…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왜 나를 납치한 거죠?"
나는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복면을 쓴 남자는 내 질문에 대답 대신 껄껄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건조하고 거칠었다.
마치 바싹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하면서도 섬뜩한 웃음이었다.
그는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시간 많으니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우선 요기나 좀 하지."
남자는 거친 손으로 빵 한 조각을 내 입에 억지로 욱여넣었다.
퍽퍽한 빵 조각이 목에 걸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건조한 빵 부스러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빵을 퉤 하고 뱉어냈다.
침과 뒤섞인 빵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당신은 콩밥 신세 면치 못할 겁니다! 감옥에서 평생 썩게 될 거라고!"
내 위협에도 불구하고, 복면은 더욱 크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비웃음과 함께 깊은 체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냉소적인 웃음이었다.
"감옥? 나는 어차피 네 덕분에 한번 죽은 목숨이야. 감옥 따위가 무서울 리 없지."
그는 한 발짝 더 나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향해 묘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시선은 내 눈을 꿰뚫는 듯했다.
"30년 만인가?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내 눈빛에 의아함이 스치는 것을 본 남자는 피식 웃으며 검은 장갑을 천천히 벗었다.
장갑이 벗겨지면서 마찰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희미한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오른 손등에는 흉측하고 거대한 흉터가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깊숙이 박혔다가 찢고 지나간 듯, 피부는 검붉게 변색되어 울퉁불퉁하게 솟아 있었다.
그 흉터를 본 순간, 내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과 함께 떠오른 이름.
그 이름은 내 심장을 마비시켰다.
'최기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