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챕터 13: 기철의 이야기

by BumBoo

나는 묶인 채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기철이는 복면을 벗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드러났지만,


어릴 적 기억 속 기철이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흉터가 선명한 오른손이 그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했다.


밀실의 공기는 무겁고 답답했다.


다음 순간, 정적을 깨고 날카로운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기철이는 미동도 없이 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의 시선이 화면에 고정되는 순간,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분노와 경멸, 그리고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화면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만으로 누구의 전화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유태경이었다.


기철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벨 소리가 멈추자마자,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알림음이 울렸다.


기철이는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제 잘 들어갔냐? 여름방학이라 시간도 많을 텐데 조만간에 또 한잔하자.>


메시지를 읽은 기철이의 얼굴은 더욱 격렬한 분노로 뒤덮였다.


그의 눈은 마치 불타는 숯처럼 이글거렸다.


그는 휴대전화를 내 팽개치듯 바닥에 던지고는, 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날 밤, 네가 불을 지르는 바람에…


불쌍한 보육원 아이들이 모두 불에 타 죽었어. 알아? 네놈 때문에!"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원한이 서려 있었다.


나는 억울했다.


내가 불을 질렀다고?


"내가 불을 질렀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내가 그런 게 아니야!"


"헛소리 마! 난 똑똑히 봤어.


네놈이 그날 밤 한수련과 비밀스러운 작당 모의를 하는 걸!"


기철이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의 눈은 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날 밤, 내가 한수련 부원장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인가?


"그럼… 그때의 복수를 위해 이렇게 나를 납치한 거야?"


내 질문에 기철이는 코웃음을 쳤다.


"복수? 그때 죽을 뻔한 것을 생각하면 너를 갈아서 마셔도 시원치 않을 거야.


하지만 너를 이곳에 잡아온 건 하찮은 복수 따위를 위해서가 아냐.”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섬뜩한 시선이었다.


"지금부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잘 들어."


기철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어둠을 밝혔다.


그는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는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밀실의 답답한 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이야기는 마치 잿빛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말이야, 워낙 잘하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었어.


그저 막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별 볼 일 없는 인생이었지.


그나마 벌어들인 돈도 온라인 도박으로 몽땅 날려버리기 일쑤였고. 젠장."


기철이는 짧게 욕설을 내뱉고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는 듯했다.


"그날도 PC방에서 온라인 도박사이트로 그날 일당을 모두 날리고 시간을 때우고 있었어.


무의미하게 마우스 휠이나 굴리면서 인터넷을 보는데,


우연히 '에덴 보육원'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더군.


순간 손가락이 멈칫했지.


호기심에 검색을 시작했는데, 이내 수많은 기사가 화면을 채웠어.


'에덴 보육원 화재 사건'. 잿더미가 된 보육원 사진, 사망자 명단…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는데, 이상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어.


사망자 명단에 그 빌어먹을 노도술 원장 이름이 없는 거야.


한수련 부원장 이름도 없고."


그는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빌어먹을 영감, 아직 살아 있으려나?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과 함께 복수심이 심장을 뒤 흔들 더군.


그놈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어.


며칠 밤낮으로 발 품을 팔고, 낡은 기록들을 뒤지고,


때로는 뒷골목의 지저분한 흥신소까지 찾아다녔지.


그리고 마침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어.


노도술이… 살아있다는 거야. 하지만 말이 살아있는 거지,


몸도 정신도 온전치 못한 상태로 어느 허름한 요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더군."


기철이는 턱을 문지르며 잠시 말을 골랐다.


그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노 원장의 비참한 말년을 눈으로 직접 보아야 속이 후련하겠다는 생각에, 그 요양원을 찾아갔지.


요양원 특유의 케케 한 노인 냄새와 독한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역한 공기가 코를 찔렀어.


병실 안, 노 원장은 해골에 가까운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더군.


살가죽만 남은 얼굴, 뼈만 앙상한 손가락, 그리고 눈만이 퀭한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어.


그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 흐릿했고,


희미하게 들리는 신음소리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있었지."


기철이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이, 영감. 나 기억나? 기철이야.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더군. 텅 빈 눈으로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어.


왠지 모를 찝찝함과 함께 허탈감이 밀려오더군.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였어. '덕구니? 덕구야.'


노 원장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오더군.


그 퀭한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스치는 듯했어. 순간 멈칫했지.


덕구. 그 이름은 분명 노 원장이 유난히 아끼던 아이 중 하나였잖아.


어쩌면 그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이 발동하더군.


나는 조심스럽게 노 원장에게 다가갔어.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지."


그는 잠시 그 순간을 회상하는 듯했다.


"'네, 원장님. 저 덕구예요. 기억나세요?'


그러자 노 원장이 힘없이 읊조리더군.


'덕구야… 얼른 준비해라. 꿩사냥 가야지.'


내 뇌리에 '꿩사냥'이라는 단어가 스쳤어.


매달 한 번씩 너만 데리고 꿩사냥을 갔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는지,


그의 눈빛에 미약한 생기가 돌더군.


나는 네 행세를 하며 노 원장에게 물었지.


'원장님, 꿩사냥에 가서 뭘 하나요?'"


기철이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노 원장이 희미하게 웃더군.


그 메마른 입술이 움직였어.


'뭘 하긴 이놈아.


코끼리 바위로 가야지.


가서 아직 못 가져온 물건들을 챙겨 와야지.'


'물건? 그게 뭐예요?'


내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노 원장은 더 이상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더군.


그 눈동자는 다시 허공을 응시하며 초점을 잃었어.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노 원장을 찾아갔지만,


'코끼리 바위'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어."


기철이의 이야기가 끝났다.


밀실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내내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지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코끼리 바위.


노도술 원장과 단둘이 떠났던 꿩사냥.


그 몽롱한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거대한 바위의 형상.


그렇다.


코끼리 바위였다.


잊고 있던 기억의 퍼즐이 조금씩 맞춰져 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