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챕터 16: 기묘한 동행

by BumBoo

다음 날 아침, 귓가를 찢는 듯한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뜨기도 전에 손을 더듬어 머리맡의 휴대전화를 찾았다.


액정에 뜬 번호는 어딘지 낯이 익었다.


어젯밤 나를 납치했던 대리 기사, 바로 기철이의 번호였다.


망설일 틈도 없이 수화기 너머에서 그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 앞이다. 얼른 준비해서 나와."


'집 앞이라고?'


나는 눈을 비비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낡은 승합차 한 대가 골목 어귀에 서 있었고 기철이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젯밤의 일이 현실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몸은 여전히 쑤시고 아팠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이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대충 옷을 걸쳤다.


승합차로 다가가자, 기철이가 기다렸다는 듯 차 문을 열었다.


그의 눈은 어젯밤과 다름없이 차갑고 집요했다.



낡은 승합차의 캐캐 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삐걱거리는 시트에 몸을 묻자, 기철이는 거침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는 우선 옛 에덴 보육원이 있던 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코끼리 바위는 에덴 보육원에서


차로 한 시간 사십 분 내외의 거리에 있었던 것 같다.


몽롱한 약 기운 속에서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을 악착같이 붙잡았다.



차를 타고 에덴 보육원으로 향하는 길,


기철이는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화재 사건이 있었던 밤,


바람이 들어오는 개구멍을 찾아 필사적으로 탈출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그의 말속에는 태경이에 대한 끈질긴 원한이 배어 있었다.


그는 어젯밤 내 휴대전화에서 태경이의 이름이 뜬 것을 보고 격분했던 일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태경이 에게 복수하겠다는 다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 자식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게 함부로 대들지 못했어.


근데 난데없이 그 새끼가 나타나서… 전부 망쳐 놨지.


내가 이 꼴로 살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다 그놈 때문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피해의식과 함께 태경이에 대한 깊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는 연신 운전대를 꽉 쥔 채 중얼거렸다.


"태경이 녀석도 어떻게든 찾아내서 꼭 손을 봐줄 거야. 반드시."


나는 그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애당초 기철이 녀석의 인생 따위에는 큰 흥미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마치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처럼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내 머릿속은 다른 생각들로 가득했다.


불에 탄 이후 에덴 보육원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잿더미 위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을까,


아니면 여전히 그 비극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리고 한수련 부원장님은… 아직 살아 계실까.


혹시 아직 에덴 보육원 근처에 계시지는 않을까.


희미한 희망과 함께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오전에 서둘러 출발했지만, 굽이진 산길을 한참 달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에덴 보육원이 있던 옛 동네에 도착했다.


30년이라는 세월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익숙했던 풍경은 사라지고 낯선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모습도 드문드문 찾아볼 수 있었다.


낡은 전봇대, 빛바랜 간판, 그리고 좁은 골목길…


희미하게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들이 묘한 향수를 안겨주었다.



에덴 보육원이 있었던 자리에는 낡은 빌라가 들어서 있었다.


녹슨 철문과 빛바랜 외벽은 이곳이 지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말해주었다.


나는 근처의 작은 슈퍼 주인에게 다가갔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안경을 쓴 노인이었다.


"저… 혹시 여기 예전에 에덴 보육원이 있던 자리 맞나요?"


내 질문에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지. 맞고 말고. 아이들이 불에 타 죽은 곳이라 불길하다고 몇 년이나 공터로 있다가,


한 20년쯤 전에 빌라가 들어섰지. 끔찍한 일이었어…."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연민과 함께 떨림이 섞여 있었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기철이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고는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의 눈은 빌라 건물을 훑었다.


"이제 여기서 어떻게 코끼리 바위를 찾을 거지?"


그의 목소리에는 조바심이 섞여 있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내 기억에 산 아래에서 코끼리 바위가 보였으니…


일단 에덴 보육원 자리를 중심으로 반경 두 시간 거리 내의 산들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바깥에서 안쪽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찾다 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기철이는 내 말을 묵묵히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음 날부터, 우리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에덴 보육원 자리를 중심으로 반경 두 시간 거리 내의 산들을 뒤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낡은 승합차는 덜컹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렸고,


우리는 말없이 창 밖의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목적이 일치하는 듯 보였지만,


그 기저에는 30년 전의 불길이 남긴 잿더미처럼 꺼지지 않는 불신과 증오가 깔려 있었다.


나는 옆자리의 기철이를 흘끗 보았다.


그의 손등에 새겨진 흉터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이 기묘한 동행의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어쩌면 유물보다 더 끔찍한 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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