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4 : 새로운 균열
어떤 집단이든 처음 외부인이 오면,
그 존재는 기존의 질서에 미묘한 균열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이곳 에덴 보육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노 원장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태경이 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역시 기철이 이끄는 무리였다.
그들의 눈에는 낯선 존재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듯한 탐욕이 번뜩였다.
“야, 신입! 건방지게 자기소개를 그 따위로 하는 새끼가 어디 있어? 다시 제대로 해봐.”
기철이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태경이는 아무 말 없이 기철이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그 나이 또래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냉철함이 서려 있었다.
“야, 귀머거리야? 내 말 안 들려?”
침묵이 이어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간을 채웠다.
“어쭈, 말을 씹어? 이 새끼 이거 일단 좀 맞고 시작 해야겠는데.”
기철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무리 넷이 태경이를 둘러쌌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미 익숙한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자, 자기소개 시-작!”
태경이는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턱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눈은 기철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흔들림 없는 시선은 기철이를 더욱 자극했다.
“이 새끼 이거 말로 안 되는 새끼네.”
주먹과 발길질이 비 오듯 쏟아졌다.
둔탁한 소리가 좁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입술이 찢어지고 코피가 터져 바닥에 붉은 점을 찍었다.
구타가 이어지는 내내 태경이는 팔로 머리를 감싼 채 기철이를 노려보았다.
고통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한눈에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 용주 형, 그리고 태경이까지 이렇게 셋은 '왕따 삼총사'가 되었다.
보육원의 삭막한 풍경 속에,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는 작은 섬이 되었다.
먼저 말을 건 쪽이 나였는지 태경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는 동갑내기에 왕따라는 비슷한 처지라 금방 친구가 되었다.
나는 에덴 보육원에서 살아남는 노하우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었고, 태경이는 그저 조용히 듣기만 했다.
태경이는 무척 말수가 적은 친구였다.
내가 가끔 실없는 농담을 던지면 그저 살짝 미소만 지을 뿐, 표정의 변화도 거의 없었다.
태경이와 친구가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태경이네 집은 엄청난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어머니는 매일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다 결국 목을 매셨고, 아버지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사업을 다시 일으키는 대로 보육원을 나갈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에덴 보육원에 아이를 맡긴 부모가 다시 찾아가는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세상에 버려진 존재들이었다.
보육원의 하루는 매우 단조로웠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장에 모여 기철이의 주도로 아침 체조를 한다.
뼈마디가 쑤시는 체조가 끝난 후,
차가운 물로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세수를 마치고,
허기진 배를 부여잡은 채 학교로 향한다.
학교는 걸어서 40분 거리에 있는데,
아침을 먹지 못하고 허기진 채 걸어가야 하다 보니 등굣길이 꽤 멀게 느껴졌다.
학교에서는 내내 점심시간만 기다린다.
빼앗아 먹는 사람이 없는데도 마치 식판과 싸움이라도 하듯 점심을 해치우고,
책상에 엎드려 밤에 불침번을 서느라 못 잔 잠을 보충한다.
학교를 마치면 곧장 보육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혹여 라도 다른 길로 샜다 가는 운 좋으면 기철이 에게, 아니면 노 원장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진다.
보육원에 도착하면 이제부터 진짜 일과가 시작된다.
보육원의 대부분 아이들은 농사에 차출되었고, 당연히 품삯은 노 원장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들은
주로 보육원 내 신축 건물 공사나 보육원 밖 건축 노동에 차출되었다.
그리고 나나 태경이처럼 덩치가 작고 힘이 없는 아이들은
주로 보육원 주변의 잡풀을 뽑거나, 여자아이들이 주로 도맡아 하는 청소, 빨래, 식사 준비 등을 도왔다.
해가 지면 보육원 밖을 나갔던 아이들이 하나 둘 보육원으로 돌아오고,
개밥인지 사람 밥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저녁을 먹고는
전기를 아끼기 위해 9시에 소등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매일매일의 반복되는 굴레였다.
그날도 그렇게 저녁을 먹고 다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낮에 아이들 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는 이유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노 원장에게 따귀를 맞았던 기철이는 그 화를 다른 아이들에게 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굴욕감이 뒤섞여 있었다.
따까리들은 기철이의 비위를 맞추느라 온갖 아양을 떨었다.
그때 아주 미세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야, 씨발 어느 새끼야. 방금 웃은 새끼 나와.”
기철이의 고함소리가 온 방에 울려 퍼졌다. 정적이 흘렀다.
“안 나와? 그래 좋아. 씨발 기분도 좆같은데 오늘 다들 자기 싫다 이거지?”
기철이의 시선이 용주 형에게 꽂혔다. 그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야, 장님 새끼 너지?”
용주 형은 기철이보다 한 살 많았지만 늘 무시를 당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역력했다.
“아냐, 나 아냐. 난 앞도 안 보이는데 뭐가 우스워서 웃겠어.”
“그러니까 이 씨발놈아. 앞도 안 보이는 새끼가 왜 쳐 웃고 지랄이야.”
평소 같으면 직접 나서지 않던 기철이가 오늘은 화가 단단히 났는지 직접 용주 형을 손 봐줄 모양이었다.
그의 주먹이 이미 치켜 올라가 있었다.
“미안, 내가 잘못했다. 제발 한 번만 봐줘라. 앞으로는 절대 안 웃을게.”
용주 형은 그렇게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손을 더듬어 기철이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의 몸은 공포에 질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철이의 화가 풀릴 때까지만 그렇게 매달려 있으면 오늘도 이렇게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유태경이 웃었어. 내가 봤어.”
평소 태경이를 못 마땅해하던 꼬맹이가 고자질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얇고 간사했다.
“뭐, 유태경이? 이 개새끼 너였구먼. 이리 와 이 새끼야.”
태경이는 무리들의 손에 잡혀 기철이의 앞에 무릎 꿇려졌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넌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 참에 신고식 한 번 제대로 하자. 이 개새끼.”
기철이가 삐딱하게 웃으며 명령했다. 그의 눈은 태경이의 얼굴을 훑었다.
“야, 이 새끼 소지품 다 꺼내서 가지고 와봐. 소지품 검사 좀 해야겠다.”
태경이의 가방에 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흩어졌고, 그중 유독 반짝이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차가운 옥빛이 희미한 불빛 아래 영롱하게 빛났다.
“어, 이거 옥가락지 아냐? 이 새끼, 너 이거 어디서 났어? 훔친 거지?”
기철이의 손이 옥가락지를 향하자, 침묵하던 태경이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눈빛에 처음으로 격렬한 감정이 스쳤다.
“돌아가신 어머니 유품이다. 돌려주라.”
평소 같으면 대꾸 없이 잠자코 있었을 태경이가 눈을 부릅뜨고 기철이를 노려보며 나지막이 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의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기철이를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다.
“지랄하네. 보육원에 버려진 주제에 무슨 엄마 유품 타령이야.
보육원생들은 이런 물건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 몰라?
앞으로 이건 내가 보관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기철이 옥가락지를 움켜쥐는 순간, 태경이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안 돼! 돌려줘. 그건 내가 제일…!”
태경이가 달려드는 순간,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따까리 무리가 태경이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둔탁한 소리가 이어지고, 코피가 터지고 입안이 터져 바닥에 피가 흩뿌려질 때까지,
태경이는 소리를 지르며 기철이 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눈은 여전히 옥가락지를 움켜쥔 기철이를 향해 있었다.
혹시라도 나섰다가 일을 더 크게 만들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태경이가 잘못했다고 빌기 만을 바랄 뿐이었다.
결국 태경이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해서 더 이상 반항하지 않게 되자, 그 모진 구타가 끝이 났다.
나는 태경이의 눈에서 고통보다 더 깊은 절망을 보았다.
나와 용주 형은 태경이를 부축해 침상에 눕히고 수건에 물을 적셔와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주었다.
작고 연약한 몸으로 그 모진 구타를 견디기가 쉽지 않았던지,
태경이는 사흘간 학교도 가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그의 얼굴은 멍으로 뒤덮여 있었고,
옥가락지를 빼앗긴 분노와 무력감이 그의 눈빛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흘째 되는 날,
기상 시간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보니 태경이가 자리에 없었다.
'결국 밤새 도망을 가고 말았구나.'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1년 전쯤 한 6학년 누나가 노 원장의 성적 학대를 견디지 못해 도망갔던 일이 있었다.
결국 멀리 가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경찰의 손에 끌려왔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노 원장에게 모진 매질을 당했다.
결국 그 누나는 보육원 뒤 호두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보육원 아이들 사이에는 저녁 불침번을 서다가 그 누나의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가 돌곤 했다.
나는 용주 형을 조용히 깨워 태경이가 달아났다고 이야기했고,
아직 멀리 가지 못했다면 모두가 깨기 전에 얼른 데려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헐레벌떡 보육원 건물을 나섰다.
낡은 보육원의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