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챕터 3 : 재회

by BumBoo

에. 덴. 강. 덕. 구.


이 다섯 글자가 귓속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얼음송곳처럼 관자놀이에 박혔다.


최면에서 깨어나 듯 찰나의 순간,


겹겹이 봉인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들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잊고 지냈던 과거의 잔영들이 눈앞을 스쳤다.


“여보세요. 도꾸야. 나야 태경이. 듣고 있니?”


수화기를 든 손이 얼어붙어 빨간 버튼을 누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차가운 냉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겨우 정신을 차려 떨리는 손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귓가에는 여전히 그 목소리가 맴돌았다.



유태경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


태경이는 분명 그때, 그 불길 속에서 죽었어.


누군가 나에게 지독한 장난을 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내가 '에덴 출신'인 것과 '태경'이라는 존재까지 아는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교실에서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나는 교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채로 얼어붙었다.


텅 빈 교실은 나의 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


띵동-


다시 정신을 차리고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액정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떠 있었다.


<나야, 태경이. 너무 오랜만이라 많이 놀랐지?

진정하고 조만간 다시 연락할 테니 만나서 소주 한잔 하며 옛날이야기도 하고 그러자.

목소리 오랜만에 들어서 반가웠어.>


진짜 태경이라고?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마치 견고하게 쌓아 올린 나의 일상이라는 성벽에 거대한 균열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섬뜩한 순간이었다.



어떻게 차를 운전해서 집으로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밤새도록 귓가가 윙윙거리는 통에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잠들려고 애쓸수록, 꿈속의 불길과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흘러도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적인 기다림이 이어졌다.


수없이 번호를 눌렀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먼저 전화를 걸어 진짜 태경이 인지 확인해 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정말 태경이라면… 아니, 그럴 리 없어.' 스스로를 다그치며 애써 외면했다.


전화번호를 바꿔야 하는지 까지 고민하며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그 한 달은 찰나 이자 영원처럼 느껴졌다.


나의 일상은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그 아래에는 불안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


다시 그 번호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통화 거부 버튼을 눌렀다.


과거와의 연결을 끊으려는 본능적인 저항이었다.


띵동-


곧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바쁜가 보네. 금방 전화하려고 했는데 일이 좀 있어서 한 달이나 지나 버렸어.

많이 기다렸지?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내주라.

내가 소주 한잔 살게. 자세한 시간이랑 장소는 다시 알려줄게.>


이쯤 되니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한 달간의 속앓이가 억울하기도 했고, 내일부터 여름방학이라 마음이 한결 가벼운 터였다.


일단 만나서 도대체 누가 이런 못된 장난을 치는지 확인해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나의 평온한 일상을 뒤흔든 존재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만나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이제 다음 연락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뒤섞였다.


다음 날 바로 문자가 도착했다.


토요일 저녁,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일식집에서 보자고 했다.


태경이 일 리가 없다는 이성적인 판단과,


한편으로는 태경이었으면 좋겠다는 복잡한 마음이 뒤엉킨 채 약속 장소로 향했다.



차를 몰아 일식집에 도착해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문을 여는 순간, 따뜻한 불빛 아래 한 남자가 보였다.


내 또래의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세련된 옷차림에 딱 벌어진 어깨. 한눈에 부유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이야- 야, 이게 얼마 만이냐? 나 알아보겠냐?”


얼떨결에 내민 손을 잡으며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눈빛과 미소,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남아있는 익숙한 흔적들.


분명 그였다.


유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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