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챕터 2 : 에덴 보육원

by BumBoo

내가 이곳의 아이였다는 사실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졌다.


기억의 가장 희미한 지점부터,


나는 에덴 보육원이라는 낡은 건물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내게는 이름만 있었을 뿐,


나를 낳아준 부모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단순한 성장이 아니었다.


매일이 어떻게 하면 배고픔을 덜고,


어떻게 하면 또래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생존의 연속이었다.


눅진한 죽 한 숟갈을 더 얻기 위한 미묘한 경쟁,


혹은 낡은 옷가지 하나를 차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싸움.


그런 것들이 이곳의 질서였다.


가끔은 '자식 없는 부잣집에 입양되는 기적' 같은 소문이 돌았지만,


그건 마치 겨울밤의 꿈처럼 허황된 이야기일 뿐,


현실이 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에덴 보육원.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혹은 부모가 없는 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아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노도술 원장.


그는 인근 마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이 '노름, 도박, 술'의 첫 글자를 따서 지어졌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의 젊은 시절은 방탕함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는 겉으로는 후원자들 앞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아이들의 미래를 논했지만,


그들의 돈은 그의 노름판과 술독으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의 위선은 낡은 보육원의 벽에 스며든 곰팡이처럼 끈질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불쌍한 한수련 부원장님을 납치하다시피 데려온 일화였다.



시골의 겨울은 길고 한가했다.


농부의 삶이 그러하듯, 가을걷이가 끝나면


사랑방에 삼삼오오 모여 화투를 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한수련 부원장님의 아버지는 운 나쁘게도 노도술 패거리에게 소위 '작업'을 당해


엄청난 노름빚을 지게 되었다.


노도술은 틈만 나면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가 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팼고,


이대로 맞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결국 노름빚 대신 자신의 딸을 내어주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이 모든 것이 부원장님을 보고 군침을 흘리던 노도술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한 일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늘 지울 수 없는 슬픔과 체념이 서려 있었다.



이 삭막한 보육원에서 내가 유일하게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한수련 부원장님 뿐이었다.


그녀는 이곳의 메마른 땅에서 피어난 한 송이 목련 같았다.


노 원장이 며칠씩 멀리 출장을 가는 날이면,


그녀는 몰래 감춰두었던 사탕이며 초콜릿 같은


귀한 간식들을 보육원 아이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그녀의 손길은 늘 따뜻했고,


그 작은 간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마음을 채워주는 위안이었다.


특히 나에게는 언제나 가장 맛있는 것을 몰래 쥐여 주시곤 했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었다.


햇살이 따스하던 어느 날에는


나에게 무릎베개를 내어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 주셨는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고왔는지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내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었다면 그런 느낌이었을까.


부원장님은 노 원장이 보육원에 없을 때만 가끔 모습을 보이셨는데,


우연히 부원장님을 마주치는 날이면 나는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그날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을 구구절절 읊어 대곤 했다.


그때마다 부원장님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맞장구를 쳐주며


인자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셨다.


노 원장과 한 부원장님은 보육원 건물 옆 사택에서 살았는데,


노 원장이 술에 취해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사택에서는 고함소리와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이면 부원장님의 팔이나 다리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나 있었다.


푸른빛, 혹은 검붉은빛으로 물든 멍 자국을 볼 때마다


나의 어린 심장은 찢어지는 듯했다.


나는 커서 힘센 사람이 되어 노 원장에게서


그녀를 구해내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



노 원장은 다른 보육원 아이들과 달리 유독 나에게만 살갑게 대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성을 붙여 '최기철, 배상길, 윤옥희' 등으로 불렀지만,


나만은 '우리 도꾸'라고 불렀다.


나는 사택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아이였고,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노 원장의 사냥에도 꼭 데려갔다.


그의 편애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를 고립시켰다.


어느 날은 술에 취해 온 원장이 보육 원생 숙소로 들어와,


"우리 도꾸가 내 아들이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모두 앞에서 술주정을 하는 바람에,


아이들의 괴롭힘은 더욱 심해졌다.


원장의 편애를 받으니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거나 질투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부러움이나 질투 같은 감정은 무언가 가진 것이 있는 자나 느끼는 사치였다.


이곳 아이들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은 그저 가진 자들을


미움과 증오의 대상으로 대할 뿐이었다.


처음 몇 번 기철이 무리에게 맞았을 때는 노 원장에게 일러바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노 원장은


"사내자식들끼리 투닥거리며 싸울 수도 있지"


라며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그의 눈에 나의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후로 나는 가급적 기철이 무리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이곳 에덴 보육원의 아이들에게도 나름의 서열이 존재했다.


보육원에서 덩치가 가장 크고 힘도 가장 센 기철이가 이끄는 일진 무리들,


그 아래로 일진들의 심부름을 해주며 기생하는 따까리들,


그리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잇속을 챙기는 평범한 무리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소위 '왕따'였는데,


나 말고도 앞을 못 보는 용주 형도 나와 같은 처지였다.


용주 형은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갑자기 두 눈이 멀어버렸다.


그의 눈은 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보육원의 숨겨진 어둠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 아이가 보육원에 처음 온 날은 무더운 여름이었다.


푹푹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땀과 먼지에 절어 거무튀튀한 피부에 때 국물이 줄줄 흐르는 보육원 아이들과는 달리,


그는 뽀얀 피부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노 원장의 손에 이끌려 오지 않았더라면,


불쌍한 우리를 도와주러 온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의 눈빛은 또래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냉철함과 지성이 깃들어 있었다.


“오늘부터 같이 지낼 친구니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자, 자기소개.”


낯선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훑어보더니 짧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감정 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