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챕터 1 : 과거의 그림자

by BumBoo

아침 6시.


또 같은 시각, 같은 꿈이었다.


꿈은 단순히 꿈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차가운 잉크처럼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깨어난 후에도 짙은 얼룩을 남겼다.


셀 수 없이 되풀이되어 온 터라 익숙할 법도 한데,


매번 깨고 나면 가슴을 짓누르는 알 수 없는 갑갑함이 밀려왔다.


마치 심장이 쇠사슬에 묶여 조여 오는 것처럼.


눈을 뜬 채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의 희미한 얼룩이 불길 속에서 아른거리던 아이들의 얼굴처럼 보였다.


‘얼른 씻고 출근해야지.’


오늘은 월요일, 교무 회의가 있는 날이다.


평소보다 조금 더 서둘러야 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삐걱거리는 관절 소리가 들렸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아침을 시리얼로 대충 때웠다.


입안에 퍼지는 눅눅한 단맛이 왠지 모르게 비릿하게 느껴졌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차로 10분 거리.


현재 시간 7시 30분.


교무 회의에 늦을 일은 없을 것이다.


쿨럭- 쿨럭-


마치 노인이 가래 기침을 내뱉듯 힘겹게 차 시동이 걸렸다.


첫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을 때 중고로 샀던 차가 올해로 만 10년이 되었다.


엔진은 낡았고, 차체 곳곳에는 녹이 슬어 있었다.


이 차는 나의 평범한 일상을 지켜주는 유일한 동반자였다.


‘이제 너도 보내줄 때가 되었나 보다.’


학교로 향하는 길,


문득 한 달 뒤면 여름방학이라는 생각에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잠시나마 꿈의 잔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번 여름방학에는 무엇을 하며 보낼까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교무실로 올라가 여느 때처럼 선생님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으니,


학교에서의 평범한 일과가 시작되었다.


“한쌤, 혹시 소개팅할래요?”


옆자리 안 선생이 오늘도 어김없이 소개팅 제안을 해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늘 활기찼다.


얼굴에는 늘 세상의 밝은 면만 보는 듯한 낙천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 친구 중에 정말 괜찮은 친구가 있는데, 한쌤이랑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예쁜가요?”


내 질문에 안 선생은 푸스스 웃었다.


그녀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럼요. 근데 한쌤도 은근 외모를 많이 따지시네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왠지 모르게 공허했다.


“농담이에요. 아직 연애할 생각도, 경제적 여유도 없네요.


아무튼 매번 이렇게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아쉽네요. 정말 괜찮은 친군데. 언제든 마음 바뀌면 이야기해요.”


“네.”


듣는 둥 마는 둥 교무 회의가 끝나고 교실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오


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어본다.


처음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의 설렘이나 사명감은 점차 희미해져 가는 듯했다.


그저 어제처럼 아무 일 없는 오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정신없는 하루 일과가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떠난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뒷정리를 했다.


칠판에 남은 희미한 분필 자국,


삐뚤빼뚤한 글씨들이 아이들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오늘도 무사히 끝이 났구나 안도하며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


조용한 교실에 날카로운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액정에 뜬 번호는 낯설었지만, 어딘가 섬뜩하게 친숙했다.


마치 내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튀어나온 숫자들처럼.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 어딘지 모르게 인위적인 온기가 느껴지지 듯한 밝은 음성이 들려왔다.


“도꾸? 도꾸 맞지?”


그 두 마디가 귓속에 박히는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차가운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에덴 출신 강덕구, 전화 아닌가요?”


에. 덴. 강. 덕. 구.


그 다섯 글자가 귓속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내가 수십 년간 겹겹이 쌓아 올린 평범한 일상의 벽이,


이 짧은 통화로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잊고 싶었던 과거가 봉인했던 기억의 문을 강제로 열어젖히는 듯했다.


“아닙니다.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나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귓가에는 여전히 그의 말이 맴돌았다.


그것은 단순한 통화가 아니었다.


마치 끔찍한 악몽이 현실로 기어 나오는 듯한 섬뜩한 예감이 나를 덮쳤다.


나의 평범한 일상은,


그 순간부터,


영원히 과거의 그림자 속에 갇히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