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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연 Oct 18. 2024

평온한 공간

: L에게

L에게     



 언제쯤이었을까. 어째서였는지조차 이젠 기억나지 않아. 난 몹시 화가 나 있었고, 온갖 불편한 감정들이 나를 휘감은 상태였다. 너에게 몹시 속상해 있었으나, 동시에 사랑하기도 해서 내 안을 가득 채운 불쾌하고도 복잡한 그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말이라도 해야 뭔가를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았을 텐데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 너는 내게 말을 붙이며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 모습이었다     


 이런저런 시도 끝에 너는 내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묵묵히 내 앞에서 나아가는 너를 뒤따랐다. 조금 가파른 곳이었고, 굽이굽이 좁은 골목을 여러 번 돌았다. 내가 자주 오는 동네였고, 제법 잘 알고 있는 곳이었음에도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낯선 초행길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어딜 가려는 걸까 싶은 물음이 턱 끝까지 찼을 즈음, 온통 키 작은 주택가뿐이던 시야가 갑작스레 트였다.     





 내가 자주 거닐던 바로 그 길들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풍경. 골목 안에 조성된 작은 공원이었으나, 탁 트인 하늘은 저만치 가까워져 있었다. 틀어막혀 있던 가슴 안의 무언가가 뻥하고 뚫리는 기분이었달까. 그제야 숨이 조금 쉬어졌다. 조금은 넋이 나간 채로 저 아래를 바라보는 내 옆에 서서 너는 그랬었지.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데려오고 싶었던 내 비밀장소야’     


 그 장소에 너와 내가 있었다. 이미 꼬여있던 마음은 풀려버린 지 오래였다. 그 순간엔 너의 비밀장소에 데려온 사람이 나라는 사실만이 중요했으니까. 공간에 추억 한 조각이 깃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과거형의 이야기. 지금도 종종 마음이 지칠 때면 그날 내가 본 그 풍경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발길 하진 않는다. 그곳에 가도 더 이상 그 공간은 내게 지난날의 평온을 가져다줄 수 없을 테니까. 다만, 차라리 더 고통스러워지고 싶은 날, 처절하게 울어버리고 싶은 날 그곳을 찾곤 한다. 거기에 가도 너는 없고 아픔만이 남았다. 하늘 아래 풍경은 그대론데,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마음 붙일 곳을 찾아 여전히 헤매고 있다. 나는 항상 나를 안정시켜줄 공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이 못미더워 공간을 찾게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간에 편안함을 불어넣어 주는 것도 사람이었고, 그 편안함을 앗아가는 것도 사람이었다. 어쩌면 여전히 공간만큼은 나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일말의 믿음이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러 공간을 전전하고 아무리 울어도 진정이 되지 않는 날이면, 나는 끝내 사람을 찾는다. 결국 사람은 하나의 공간이었을까. 내가 사랑하던 너는 이미 과거의 공간임을 알면서도, 부쩍 너라는 공간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네가 데려간 그 공간처럼, 너는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공간임을 나는 무너지는 순간마다 절감한다.     



 이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버린 네가, 내가 꾸밀 때보다 더 나아졌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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