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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연 Aug 12. 2024

눈물이 날 때면 수플레를 먹습니다

2. 정체되어 있는 나의 사회적 정체감




나는 어디에 속해있는가


 공부와는 별개로, 나는 출근을 위해 오래된 습관이 되어버린 5시 반 기상을 고집한다. 조금더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의무가 아니어버리면 한없이 풀어져 버릴까 경계한 탓이다. 그렇게 5시 반쯤 깨어나 조금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준비과정을 거치고 집을 나서면 걸음을 바삐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7시의 거리에는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 혹은 가벼운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 그리고 그 속을 함께 걷고 있는 내가 있다.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내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난 이들과 정말 같은가? 교복 입은 무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와 같은 공부를 하는 이들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일었으나 그들에게 난 이미 고등과정을 벗어난 타인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향하는 곳이 나의 직장도 아니지 않은가. 나의 목적지는 그 어떤 의무도 주어지지 않고 오롯이 나의 의지로 모든 일을 진행하는 도서관이었다. 나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이도 없고, 월급을 주는 이도 없다. 무리에 섞여 아무리 같은 방향을 향해도 나 홀로 역주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기



 저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나는 어디에 속해있는 사람일까. 애초에 현재의 내가 속한 집단이 있기는 할까. 굳이 묶자면 수험생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 수는 있겠으나 그들 사이에는 타 집단이 가지고 있는 정도의 끈끈한 애착이나 집단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험생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각자의 여정을 향하는 나그네에 가까운 존재이다.


 어느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하며 내 정보를 입력하면서도 나를 나타내는 수식어를 찾기는 어렵다. 학생이라는 카테고리를 설정하자니 세부 설정에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 정도가 전부이다. 저 중에 나를 소개할만한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를 ‘기타’로 명명해야 한다. 난 현재 사회로부터 ‘기타’인 존재인 것이다.



 한때 가족이 아닌 어느 한 무리에 소속되어 지냈던 시기들이 있었다. 미성년의 시기에는 학생이라 불렸고, 일을 하면서부터는 직장인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어딘가에 속해있다는 자각조차도 없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과제들을 해내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게 학생일 때는 학업이었고, 직장에서는 주어지는 일들이 존재했다.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주제는 그런 내 일상을 둘러싼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를 둘러싼 울타리가 있다는 사실은, 때로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에 울타리 너머를 동경하게 만들기도 한다.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벽이 되어주기도 하고 ‘그들’과 ‘우리’를 나눔으로서 개개인에게 소속감을 부여하여 집단을 이루도록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은 나를 증명하는 간편한 수단이 되고 긍정적 정체감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그 안에 속함으로써 나는 그들과 공을 함께 나누어 가지게 되고 애써 나의 실력 따위의 것들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반복을 통해 자리 잡아가는 일상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고, 안정감을 디딤돌 삼아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단에 속하고 나를 증명할 필요가 덜어짐에 따라 사회적 태만이 발생할 가능성은 있다.


 사회적 태만이란, 집단으로 공동 작업을 할 때 일인당 과제 수행능력이 인원의 증가에 따라 감소하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말해 사람들 속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자신의 책임을 개인일 때보다 적게 느끼는 것이다. 적게 하는 노력은 게으름과 이어지기도 쉽고 자기계발을 게을리하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하기도 한다.


 또 다른 점으로는 집단에 속함으로 인해서 몰개성화가 벌어질 수도 있다. 몰개성화는 집단에 속해있으며 자신의 개성이나 의견, 특성 등을 잃어버리고 집단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현상은 동조 압력으로 이어져 자신의 의견과는 달라도 집단의 의견에만 따르게 되는 등 맹목적으로 변질되어 여러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물론 내가 수험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은 본래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집단 안에서 느끼는 안정감만큼이나 큰 답답함이 존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집단 안에서 나를 점점 잃어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때로 상당한 공포감으로 다가오기도 했으니까. 수많은 물음표가 존재함에도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원래 그런거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와 같은 생각들은 나를 좀먹어 갔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욕구를 직면 할 때에야 나와 맞지 않았던 정체성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렇게 난 무소속의 기타인 인간이 되었지만 그럼 또 어떠랴.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내가 제대로 된 나의 길을 찾아 걷고 있으면, 또 어느샌가 진정으로 내게 맞는 집단에 나도 모르는 순간 속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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