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란 사실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이라는 것

이루는 삶, 포기하는 삶

by 홍연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일이, 실은 하루씩 죽음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라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사고의 형태를 반전시킨 예이다. 처음 이 말을 듣고는 머리를 맞은 듯 크게 깨닫는 과정이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죽음에 대해 정면으로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삶에 죽음은 언제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게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생의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가는 내게 늘 화두였다. 죽음을 전제하면 언제나 내가 지금 이순간 무엇을 해야하는가가 뚜렷해졌으므로,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나의 모든 선택은 '만일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면'을 가정하고 내렸던 선택들이었다. 이러한 나의 사고과정을 모르는 이들은 나의 행보가 극단적이고 즉흥적으로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죽음을 마주했던 경험이 있는 내게는 그저 먼 곳만 바라보며 사는 일이 공상에 가까울만큼이나 이상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에, 다른 선택은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굳이 그들에게 설명하고 설득을 할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나는 그저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질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만 해야했던 시기의 내가 느꼈던 무력감을 그 누가 알까. 모든 것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은 고문에 가까웠다. 어쩌면 그게 내 삶의 형태를 이런 식으로 만든 트라우마의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나의 순간이 돌아오면 지금 내가 느낀 무력감들을 모두 보상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할 뿐이었다.




그렇게 인정욕구로 가득 찬 내가 여기 섰다. 나의 생은 한정되어 있고, 내게 선택을 요구한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기준의 우선순위를 가진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가늠하며 앞에 있는 것들을 위해 뒤에 있는 것들을 포기한다. 그것이 나의 삶이었다. 모두가 하나씩 이루어 나가는 나를 보며 대단하다 말하지만, 사실 나는 이루는 삶이 아닌 하나씩 포기하는 삶을 살고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으니, 뒤에 있는 것 하나 포기하는 일은 감수할 수 있는 고통이다. 그러나 하나씩 차례대로 포기해나가는 일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난 이루기 위해 울고 또 운다. 나의 부족한 자원을 아쉬워하고, 다시 한번 포기해야하는 현실의 벽을 마주하며 그저 손을 놓는 법을 배우는 것이 삶의 과정인가보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쥐고 있던 손을 놓는다.



힘들었던 순간에는 역설적이게도 먼 곳만 보며 살았다. 당장 내 눈 앞에 놓인 무력감만을 바라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억지로 하늘만 바라봤다. 이룰 수 있건 없건 중요하지 않았다. 바라는 미래만을 그리며 나 자신을 지탱해나갔다. 그리고 오늘 나의 손에 그때 보던 책이 있었다. 전혀 달라진 상황 속에서 같은 책을 읽는 나는 이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내 앞에 놓여있는 벽을 바라보며, 이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포기해야하는 것들을 직시한다. 꿈꾸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꿈은 꿀 수 있었던 그때가 더 행복했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삶은 언제나 모순덩어리.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내던져진 앨리스. 채셔고양이같은 삶을 욕하며 그래도 나는 살아간다. 내가 더이상 두려워할 것이 있는 사람이던가. 내겐 살아감으로써 갚아야 할 일들이 많을테니, 포기하는 삶이라도 어딘가엔 쓰임 받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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