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것에 마음이 기울었다 (2)

이름 없는 밤의 시작

by 홍연

배낭을 맨 채 들어선 방 안은 고요했다. 창밖의 바람 소리조차 잠잠했고,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달빛이 바닥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문이 닫히고 난 뒤, 그 안에 남은 것은 오직 사라와 낯선 공기의 결뿐이었다. 여행을 다니며 여러 공간을 지나왔지만, 이 방의 공기는 이상하게 맑고 무거웠다. 낯섦과 기대가 뒤섞인 그 무게감 속에서 사라는 천천히 짐을 풀기 시작했다.


가방 지퍼를 열자, 옷과 소품들이 구겨진 채로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는 차례차례 옷을 꺼내 침대 위에 펼쳐놓았다. 접힌 자국을 펴며, 바닷가에서 입었던 민소매 티셔츠를 조심스럽게 정리하던 손길이 이내 멈췄다. 그 순간, 머릿속에 아까 본 풍경이 그려졌다. 햇살이 내려앉은 오후, 바다를 배경으로 지평선을 바라보던 남자의 모습.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얼굴은 옆으로 살짝 돌아가 있었으며, 그 이마와 눈썹 위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말없이, 묘하게 고요한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던 그의 실루엣은 지금 생각해도 낯설게 아름다웠다. 마치 그가 서 있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를 들어 무심히 눌렀던 셔터의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바람의 소리, 파도의 리듬, 햇빛의 온도, 그 순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리고 조금 전 부엌에서 마주친 그의 또 다른 모습. 와인병을 잡고 있었던 그 손, 잔을 비우며 웃던 옆모습, 그리고 살짝 기울어진 어깨. 셔츠 안에 언뜻 비치는 단단한 체격. 그의 손목엔 시계가 없었고, 팔에 햇빛에 살짝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것조차도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동작이었는데도 왠지 모르게 시선을 끌었다.


사라는 그 두 장면을 교차하며 떠올렸다. 지평선을 바라보던 낮의 그와, 와인병을 조심스레 다루던 저녁의 그. 마치 같은 인물이면서도, 또 전혀 다른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홀로 생각에 잠겨있던 사라는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린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뭐야 진짜…”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이며 이불 위로 몸을 돌렸다. 고개를 세게 저으며 생각을 털어내려 애썼다. 눈을 감아보았지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그저 스치듯 지나친 사람일 뿐이다. 수많은 여행자 중 한 명. 어디서 왔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남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을 매듭지으며 사라는 짐 정리에 다시 집중하려 애썼다.

마음은 자꾸 산란해졌다. 신발을 정리하고, 여행 책자를 서랍에 넣고, 수건을 구겨진 채 펴려 애쓰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자꾸 흐려졌다. 온전히 집중되지 않는 손끝이 그녀 스스로도 답답했다.


결국 침대 위에 털썩 누워버렸다. 머리는 베개 끝에 걸쳐지고, 이불이 엉켜 다리에 닿았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건 자신의 숨소리뿐. 그 고요 속에서 마음은 더 요란해졌다.


몸을 옆으로 돌리자, 탁자 위의 작은 포스터 한 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딘지 낡아 보이는 포스터였다. 손때가 닿은 가장자리, 살짝 접힌 자국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색채는 여전히 선명했다.

포스터 중앙, 크게 쓰인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늘 밤, 기억을 남겨요. 8시, 마당.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박혀 있었고, 그 아래로는 고기 굽는 연기와 맥주잔을 든 사람들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기타를 들고 있었다. 그림 속 장면은 너무도 평범했지만 그 밤의 분위기를 미리 전하는 듯했다.


사라는 문득 들어올 때 마당에서 마주쳤던 풍경이 떠올랐다. 누군가 숯불에 성냥을 대던 모습, 누군가는 플라스틱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냄비 뚜껑을 열어본 사람이 있었다. 아직 불완전한 준비의 풍경,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활기가 묘하게 따스했다.


시계를 보았다. 8시 10분. 숫자가 묘하게 눈에 박혔다. 10분 늦었다. 하지만 파티에 참가하기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 시간. 갈까 말까 망설임이 다시금 머리를 흔들었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과, 조금은 들뜬 마음이 서로 충돌했다. 오늘 하루의 끝을 조용히 보내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무언가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사라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거울 앞에 잠깐 서서 머리를 정리했다. 화장은 하지 않았지만 입술에 립밤을 살짝 바르고, 발에 슬리퍼를 꿰었다.


게스트하우스의 나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마음은 묘하게 느릿했다. 누군가와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마음이 동시에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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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다다랐을 때 마당은 이미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일곱 명의 사람들이 고기를 굽고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불빛이 사람들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고, 누구 하나 거슬리는 기색 없이 어깨를 부딪치며 웃고 있었다. 그들 사이, 조용히 웃고 있는 한 사람. 아까 와인을 따르던 그 남자였다. 낯선 조명 아래 그의 눈은 낮보다 더 깊었고, 웃을 때 입가에 생긴 주름이 사라의 가슴 어딘가를 간질였다.



“오셨어요!”


누군가 손을 흔들며 사라를 반겼고, 다른 사람도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빈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는 맥주, 소주, 와인까지 다양한 술이 늘어져 있었고, 종이컵에는 소스가 흘러 넘쳐 있었다. 누군가는 고기를 굽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미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사라가 어색하게 두리번거리자, 옆에 앉은 남자가 몸을 살짝 기울이며 설명했다.


“지금 자기소개 중이었어요. 그런데 재미로 이름이랑 연락처는 안 묻기로 했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이 밤을 특별하게 남기자고요. 여행 끝나면 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잖아요. 그 전까지만, 그냥 이 시간만.”


그 말에, 주변 사람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는 순간, 마음속 어딘가가 잔잔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이름도, 연락처도, 아무 정보도 묻지 않은 채로 함께 나누는 시간. 어쩌면 그게 더 오래 기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 여전히 조용히 웃고 있는 그 남자.

어쩐지 기묘한 신비감이 더해진 그 모습과 함께, 게스트 하우스의 밤은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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