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이었다
강사라는 여름을 사랑했다. 여름의 공기에는 마치 젖은 필름처럼 묘한 감정이 스며 있었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는 누구든 자신의 껍질을 벗어두고 진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히도록 더운 날씨, 셔츠 사이로 흐르는 땀,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던 바닷물까지— 모든 게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여름은 사라에게 단지 계절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었다.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길 위에 선다는 것은 그녀가 가장 자기답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했다.
이번 여행지도 그랬다. 지도 위에서는 조그맣게 표시된 남해의 해안 마을. 말하자면 소문난 여행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사람에 치이지 않고, 하루 종일 바닷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밤이 되면 별이 쏟아지는 곳. 사라는 혼자 그곳을 택했고, 게스트하우스 한쪽 방을 예약한 뒤 배낭을 메고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길을 이어왔다. 여정의 고단함보다, 낯선 곳에 발을 딛는 그 설렘이 그녀를 더 가볍게 만들었다.
숙소에 도착해 간단히 짐을 풀고, 사라는 곧장 해안으로 향했다. 바다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고, 갈매기 소리가 멀리서 날아왔다. 해는 천천히 기울고 있었고, 바닷가 근처의 모래는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사라는 그 빛의 결을 따라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스며들고, 잔잔한 파도가 발목에 스쳤다.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고, 목덜미는 해에 그을릴 듯 뜨거웠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 감각들이 좋아 웃었다.
어깨에 걸친 작은 필름 카메라의 무게가 익숙했다. 사진은 사라에게 있어 감정을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을, 셔터 한 번에 눌러 담는다는 건 어쩌면 그녀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라는 렌즈를 들어 바다를 바라봤다. 지평선이 느릿하게 수평을 그으며, 점점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빛의 색은 변화했고, 그 변화를 따라 셔터를 눌렀다.
그러다— 누군가의 실루엣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모래 언덕 가장자리.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한 남자. 헐렁한 셔츠를 입고 있었고,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의 옆모습은 빛과 어둠 사이에 있었고, 마치 시간을 잠시 멈춰 놓은 사람처럼 조용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모습은 단지 바다를 찍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라기보다는, 풍경 그 자체와 어울려 하나의 장면이 되어 있었다.
사라는 말없이 카메라를 들었다. 피사체를 뚜렷하게 들이대지 않은 채, 풍경 안에 자연스럽게 그를 담아냈다. 그 순간만큼은 프레임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마치 그 자리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처럼 무심했고, 그녀는 그 장면을 우연처럼 만났지만 필연처럼 기록했다. 셔터 소리 하나가 바닷바람 사이로 가볍게 섞였다. 그리고 사라는, 피사체의 얼굴을 정확히 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장면은, 그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억될 수 있으니까.
해는 더욱 낮게 깔리고, 파도 소리는 저녁 바람을 타고 더욱 또렷해졌다. 사라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누구일까. 어디에서 왔을까. 왜 저렇게 고요할까. 물음표가 연달아 떠올랐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것이 더 아름답게 남을 수 있다는 걸,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존재가 들킬까봐 조심스레 발걸음을 돌렸다. 괜히 그 순간이 깨질까봐, 이 감정이 이름을 갖기 전에 사라질까봐.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 시간은 어느덧 해가 완전히 지고 난 후였다. 하늘은 남은 빛마저 삼키고 있었고, 밤의 공기가 조금씩 눅눅하게 피부에 닿았다. 입구 앞 마당엔 작은 조명이 켜져 있었고, 조그마한 테이블 몇 개와 파라솔 아래서 사람들 몇이 숯불을 피우고 있었다. 바베큐 파티가 시작된 듯했다. 종이 간판에 손글씨로 쓰인
오늘 밤, 기억을 남겨요. 8시, 마당
이란 문구가 걸려 있었다.
누군가의 손글씨가 정성스러워 보였다. 사라는 그 글귀를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이름 없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마주하는 밤—그런 밤이 올 수도 있을까?
복도를 따라 방으로 향하던 사라는, 짐을 끌던 손을 잠시 멈췄다. 공용 부엌 안쪽, 문이 반쯤 열린 그 틈으로 은은한 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안, 와인병을 조심스럽게 기울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팔, 유리잔에 떨어지는 와인의 붉은빛, 그리고 익숙한 옆얼굴.
그는, 낮에 바닷가에서 본 그 남자였다. 한 장의 풍경으로만 남을 줄 알았던 존재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의 얼굴은 조명이 닿아 한층 더 부드러워 보였고, 시선은 창가 쪽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정돈돼 있었다. 사라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숨을 죽이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손끝까지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그녀는 소리 없이 그 자리를 지나쳤다.
그 장면은 사라에게 오래 남았다. 사람의 인상은 이름보다 먼저, 말보다도 더 깊이 스며드는 법이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른 채. 하지만 그 장면 하나로 누군가를 오래 기억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날 밤, 사라는 처음으로 느꼈다. 어떤 만남은 이름이 없어 더 특별해질 수 있다는 걸.
그리고 어딘가 마음 한켠에서, 작고 희미한 예감이 피어났다.
오늘 밤, 그는 사라의 기억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