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계절 (6)

세번째 계절의 끝자락에서

by 홍연

물결처럼 출렁이던 조명의 잔광이 밤하늘에 흩어졌다. 사람들의 함성은 여전히 이어졌고, 무대 위에서 쏟아지는 빛들은 마치 끝없이 반복되는 축제의 물결처럼 일렁였다. 하지만 그 찬란한 풍경 속에서, 유연은 마치 투명한 유리막 너머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불빛 하나하나가 멀게 느껴졌고, 사람들의 열띤 목소리는 무언가 잘못 조율된 오케스트라처럼 뭉개져 들려왔다.


그녀는 조용히 무릎 위에 손을 올려두고, 들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보겸의 존재가 가깝게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그 순간,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고요를 가르며 스며들었다.


“괜찮아? 아까부터 계속, 얼굴이 좀... 굳어 있었어.”



보겸의 말은 자극적이지 않았다. 흙먼지 날리는 봄바람처럼 조용했고, 그렇기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유연은 대답 대신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에는 스스로를 붙잡기 위한 침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안심이나 괜찮다는 표시보다는, 마치 스스로에게 ‘이제 괜찮아져야 한다’고 타이르는 듯한 작고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보겸은 그 고갯짓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잠시 시선을 낮춘 뒤, 다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혹시… 나 때문에 불편했으면, 정말 미안해. 갑자기 그 상황이 닥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거든… 그냥, 뭔가라도 도와주고 싶었는데…”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더는 유연을 정면으로 보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하기 어렵다는 걸, 더 말하게 하면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무게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유연은 잠시 시선을 멀리 두었다. 저 멀리 축제 무대 위에서 춤추듯 움직이는 조명, 그 아래 반짝이는 사람들의 손짓, 그리고 머리 위로 천천히 흘러내리는 벚꽃잎들. 밤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잠깐 그녀의 마음도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무대 뒤편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터졌다.



“여러분이 기다리셨던 밴드! 세 번째 계절, 무대 위로 모십니다!”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무대의 조명이 한순간 꺼졌다가, 다시 은은하게 켜졌다. 그리고 어둠을 헤치며 천천히 등장한 세 사람. 그들 가운데, 기타를 어깨에 걸치고 조용히 서 있는 보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첫 음이 울려 퍼졌다. 기타의 선율이 밤공기를 가르며 흐르고, 곧 보컬의 낮은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흩날리는 계절 끝에서 / 한 번쯤은 너를 다시 볼 줄 알았어…”



가사 한 줄이 마치 칼날처럼 유연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 순간,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눈앞이 어두워지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속눈썹 끝이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무대 위의 그 노래는 너무 정직했고, 너무도 유연의 기억과 닮아 있었다. 사랑이 끝나던 그 밤, 지하철역 앞 벤치에 홀로 앉아 울음을 삼키던 자신, 뒷모습을 보며 한없이 작아졌던 시간들, 마지막으로 남은 메신저 속 차가운 한 줄의 문자. 그 모든 기억이 음악이라는 이름의 필름 위에서 되감기처럼 재생되었다.


한동안 그녀는 움직이지 못했다.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심장 박동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보겸의 목소리가 조용히 그녀를 감쌌다.



“이 노래… 좋아한다고 했지?”



유연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말이 나오지 않았고, 눈가엔 서서히 차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잠시 후, 보겸은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다. 그리곤 따뜻한 자판기 커피 두 개를 꺼냈다. 종이컵 하나를 유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그 따스한 감촉에 놀라듯 손가락을 움츠렸지만, 곧 그것이 사람의 체온이라는 걸 깨닫고 살짝 더 쥐어잡았다. 마치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처럼, 잊고 있던 위로처럼.



“지금은… 그냥 듣고 싶은 노래 듣는 시간이야. 너무 생각 많이 하지 마.”



그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무대 위를 향해 눈을 두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더 다정했다. 애써 무언가를 꿰뚫지 않으려는 태도, 그녀의 상처 위에 어떤 해석도 덧붙이지 않으려는 그 말투. 그것이 유연의 마음을 조금 녹였다.


노래는 이어졌다.



“지나간 사랑이 다 그렇듯 / 예쁘고, 아프고, 멀어졌지…”



유연은 고개를 들고, 무대 위에서 반짝이는 조명 사이로 떠오르는 가사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야가 조금 흔들렸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프기만 하던 기억들이 조금 덜 날카롭게 느껴졌다. 아직도 가슴 한쪽은 무거웠지만, 아주 조금은 괜찮아지고 있다는 조용한 신호가 마음속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그게 음악 때문인지, 밤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옆에서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내밀어 준 누군가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 유연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겸아…”



보겸은 고개를 돌리지도,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냥 짧게 대답했다.



“응.”



“…고마워.”



그는 여전히 무대를 바라보며, 짧은 한 음절로 답했다.



“응.”



그 말 속에 어떤 감정이 들어 있는지, 유연은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눈을 감고 아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마음 한켠에 조심스럽게 문장을 적어내려갔다.



‘이건 설렘이 아니야. 회복이야. 나는 지금, 천천히 괜찮아지고 있는 중이야.’



밤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축제의 열기와 무대 위의 환호가 조금씩 멀어지고, 소리 없는 밤이 그 자리를 천천히 채워나가고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무대 앞. 흩날리던 벚꽃잎들도 더는 갈 곳을 찾지 못한 듯, 땅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바람은 무대 뒤편에서부터 캠퍼스 안으로 스며들었고, 유연은 그 속을 조용히 걷고 있었다.


보겸은 그녀의 바로 옆을 말없이 따라 걸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웠지만, 말은 없었다. 그 침묵은 불편하거나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연이 아직 무대에서 완전히 내려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챈 듯, 그의 조용함은 조심스럽고 따뜻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조금 걸을래?”



보겸이 조심스레 물었고, 유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건네는 제안은 지금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캠퍼스 안쪽, 불빛이 드문 산책로로 방향을 틀었다. 가로등 사이사이 멀어진 불빛 아래, 벚꽃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었고, 바람은 가지 사이로 스치며 꽃잎을 떨궜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그 자리를 밤바람의 서늘한 숨결과 바스락거리는 잎새 소리가 채워갔다.


유연은 말없이 걷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조금 들었다. 나무 사이로 가느다란 달빛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벚꽃잎들이 천천히 공중을 떠돌다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장면은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 순간, 보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무대, 어땠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좋았어.”



유연이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한마디로는 담을 수 없는 감정들이 분명히 있었다.


공연을 준비하며 쌓인 긴장감, 무대 위에서 느낀 울컥한 감정, 그리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그 찰나의 순간. 그 모든 것이 유연의 마음속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로 뒤엉켜 있었다. 그래서 “좋았어”라는 말은 너무 간단했다. 너무 작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침묵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순간이었다. 어떤 대화보다도 깊고 조심스러운 감정의 교환이 그 고요한 시간 안에 있었다. 유연은 가볍게 손끝을 흔들며 걸었다. 마치 손으로 밤공기를 만져보는 것처럼, 무언가를 더듬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저 무대에서 건욱이랑 같이 춤춘 적 있어. 1학년 축제 때, 아무 생각 없이… 둘 다 신나서, 그냥 무대에 올라갔었거든.”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에 스치듯 지나가는 감정이 있었다. 추억은 언제나 그렇게 불시에 고개를 들었다. 보겸은 고개를 돌려 유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짧게, 아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요 없는 그의 반응은 유연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즐거웠어?”



“응. 그땐 진짜, 마냥 즐겁기만 했어.”



유연은 잠시 웃으려 했지만, 그 웃음은 입가에서 멈췄다. 눈동자엔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근데…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날 이후로, 같이 뭘 한 적이 없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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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올려다봤다. 벚꽃 가지들이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고, 순간적인 바람에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그 아래에서 유연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무대 위에서 가슴속을 불쑥 쓸고 지나갔던 감정, 예상치 못한 무대에서 느꼈던 당황스러움, 그리고 관객석 어딘가에서 스쳐 마주친 건욱의 눈빛. 모든 게 순식간에 스쳐지나갔지만, 그 파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의 한가운데, 누군가가 내민 따뜻한 손이 있었다. 보겸이었다. 그 손은 어떤 말보다 깊고 조심스러운 위로였다. 벚꽃이 유연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한동안 숨을 고르듯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밤공기 속에선 아직도, 무대의 여운과 세 번째 계절의 감정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보겸아.”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응?”



“…그냥, 오늘 고마워.”



보겸은 짧게 웃었다.



“뭐가 갑자기.”



그리고는 덧붙였다.



“나는 그냥, 네가 그 감정에서 천천히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 잊으라는 말은 못 하겠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그 말은 유연의 가슴속을 조용히 두드렸다. 무엇보다 따뜻하고, 이상하게 단단한 말이었다. 위로도, 강요도 아니었고, 그저 유연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말.


그들은 말없이 걷고, 또 걸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들의 그림자는 나란히 늘어졌다. 유연은 보겸의 실루엣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익숙한, 편안한 느낌. 하지만 그 안에서 이유 없는 이끌림이 작게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유연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감정은 이름 붙여지지 않았고, 말해지지 않았으며, 아직은 유연의 마음속에서만 아주 조용히 피어나는 중이었다. 바람처럼, 벚꽃처럼. 말없이 그녀 안에 내려앉았다.

밤은 그렇게, 더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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