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나는 계절
다음 날, 햇살이 부서지듯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알람 소리를 세 번이나 넘기고 겨우 눈을 뜬 유연은, 어젯밤의 감정들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꿈처럼 엉켜있는 채로 이불을 걷어냈다. 머리맡에 놓인 폰 화면엔 새 메시지가 떠 있었다.
[보겸] 잘 잤어? 아침에 춥다. 옷 따뜻하게 입어!
짧은 문장. 그런데도 그 안에 담긴 다정함이 유연의 가슴에 조용히 파문을 일으켰다.
‘왜 자꾸 생각나지?’
유연은 답장을 보내지 않고 그냥 폰을 내려놓았다. 학교로 가는 길,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어젯밤 공연에서 들었던 세 번째 계절의 한 곡이었다. 가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 계절의 끝에 서 있던 너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스쳐가는 바람처럼 멀어졌지.”
지금 이 노래는 건욱을 떠올리게 했고, 동시에 보겸의 눈빛도 떠올리게 했다. 유연은 고개를 흔들며 노래를 넘겼다.
교양 수업이 있는 강의실. 늘 앉던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펴고 펜을 들었지만, 글씨는 흐릿하게 맺혔다. 교수님의 목소리는 마치 유리창 너머의 소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건욱과의 마지막, 그날의 대화, 이별의 진짜 이유…. 그리고 보겸의 손. 그 다정했던 손.
노트 여백 한쪽에 무심결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나는 아직 그 계절에 있어.”
유연은 멈춰서 그 글자를 한참 바라보다 조용히 펜을 내려놓았다. 자신도 모르게 썼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계절이 있다는 걸.
“백유연.”
낮 2시 16분. 강의가 끝나고 도서관으로 향하던 길목. 폰 화면에 찍힌 이름을 보자 유연은 걸음을 멈췄다.
[박건욱]
배터리 76%. 와이파이 3칸.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수치들이 지금은 유연의 머릿속에서 비정상적으로 선명해졌다. 통화 버튼 옆에는 곧장 이어서 도착한 새 메시지 하나.
[박건욱] 어제… 미안했다. 괜찮았어?
“괜찮았냐고?”
유연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눈을 감고 잠깐 숨을 들이마셨다. 축제 무대 위에서 그를 다시 봤을 때, 처음엔 현실감이 없었다. 그리고 그 손이 올라갔을 때, 무릎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가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박건욱] 너 얼굴 보니까… 좀, 이런 말 웃기지만. 그냥 계속 생각나더라.
그 말은 또 하나의 시간문을 열어젖혔다. 다정했던 시간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던 버릇, 거짓말처럼 조용히 멀어졌던 마지막 그 날의 표정. 그리고,
그날 밤 무대 위에서의 손짓.
'왜 지금이야.'
수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메시지를 지우지 못한 채, 유연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지워도, 정말 지워지는 걸까. 무대에서 마주친 그의 눈빛은 지금도 생생하다.
‘설렘이 아니야. 다시 끌리는 것도 아니야. 그냥… 너무 오래 아팠던 것뿐이야.’
폰 화면을 끄고, 유연은 도서관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는 여전히 그 계절의 냄새로 가득했다. 하얀 공책에 남겨진 잉크처럼 번지고 또 번지는 감정. 단단히 봉인했다고 믿었던 그 계절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도서관 3층, 창가 쪽 한적한 자리에 앉은 유연은 공강 시간을 채우려 들고 온 책을 펼친 채, 한 줄도 읽지 못한 채로 앉아 있었다. 책장 너머 창밖에는 흐릿하게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햇살이 들어온다는 이유만으로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엔 박건욱이 있었다.
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메시지는 아직도 그대로였다.
[박건욱] 너 얼굴 보니까… 좀, 이런 말 웃기지만. 그냥 계속 생각나더라.
'그냥 계속 생각났다'는 말은, 유연에게 모든 걸 흔들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 한 문장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작된 그 메시지가, 유연의 지난 몇 개월을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손끝이 느리게 키보드를 눌렀다.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한번 감았다가 떴다. 몇 번이나 썼다가 지운 문장들이 머릿속에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마침내, 보냈다.
[유연] 얼굴 본 건 나도 좀… 이상했어. 어색하기도 하고. 그냥 그랬다고. 뭐, 괜찮았어.
짧은 문장, 담담한 말투. 하지만 유연의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숨이 나왔다. 유연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이게 괜찮은 선택일까?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조용한 공간 속에서 책장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멀리서 누군가 졸고 있는 숨소리, 그 모든 소음 사이로 유연의 마음속에는 한 계절이 다시 피고 있었다. 단지 안부를 주고받은 것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시끄러운 걸까. 답장을 보내고 한참 동안, 유연은 핸드폰을 내려놓지도, 손에서 놓지도 못한 채 테이블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읽음’이라는 조그마한 회색 글씨가 화면 위에 떠올랐을 때— 그 순간, 유연의 마음 한구석이 툭, 하고 꺼졌다. 읽었네. 하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몇 분이 흘렀다. 그 몇 분은 마치 몇 시간을 버틴 듯한 체감이었다.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읽고, 그냥 무시하는 걸까? 아니면 답장할 말이 없는 걸까? 혹시, 내가 먼저 보낸 게... 후회할만한 일이었나? 괜히 다시 흔들렸나? 책장을 덮고 다시 열고, 물병을 땄다 닫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유연은 온갖 행동을 하며 아무 일 없는 척을 반복했지만 그녀의 신경은 여전히 핸드폰 화면 한가운데, ‘읽음’ 표시 위에 고정돼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그녀는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어버렸다. 그게 그나마 마음을 덜 상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무시당하는 기분보다 모른 척하는 게 편할 때가 있다. 그리고 유연은 지금 그 편함에 기대기로 했다.
그러나 도서관을 나와 저녁 공기를 마시고,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따라 걷다가— 조금은 잊혀졌던 그 순간. 진동이 울렸다.
손에 쥔 커피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박건욱] 혹시, 시간 되면… 잠깐 볼 수 있을까?
다시 봄이 흔들렸다. 한참을 멈춰 선 채로 유연은 그 메시지를 바라봤다. 심장이, 말랑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손끝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건 유연에게 그보다 더 복잡한 말처럼 느껴졌다. '만날 수 있냐'는 말이 왜 이렇게 무겁게 다가오는 걸까. 왜 이렇게… 또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 걸까.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커피가 식어가는 것도, 벚꽃이 흩날리는 것도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메시지 하나에, 봄의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조용해진 밤. 문이 닫히고, 불이 꺼지고, 침대에 누운 유연은 핸드폰을 품에 안은 채 눈을 감았다 떴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가 닫고,
'괜찮아’
'지금은 좀…’
'생각 좀 해볼게'
수없이 써 놓은 문장들이 한 글자씩 화면을 채웠다가 도로 지워졌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유연은 한 문장을 남긴다.
“그때 네가 했던 말, 아직 기억나.”
손끝이 떨렸지만,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곧바로 핸드폰을 엎어두었다. 더는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듯, 더는 자신을 흔들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때'가 언제인지, '그 말'이 무엇인지 유연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 문장 안에는 미처 다 흘려보내지 못한 시간들과 마음들이 조용히 담겨 있었다. 건욱은 알까. 이게 유연이 보낼 수 있는, 가장 용기 낸 한 문장이란 걸. 그리고 그 한 문장이, 만나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마지막 인사인지를—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답장을 보낸 밤, 그 이후로 건욱에게서 다시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유연도 더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건, 다시 시작하자는 말도 아니었고 완전히 끝내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한 번쯤 꺼내보이고 싶었던 마음. 아무도 모르게 오랫동안 품고 있던, 조금은 무겁고 조금은 부드러웠던 잔상 같은 감정.
시간이 흐르고 봄 축제의 분홍빛 조명도 세 번째 계절의 무대도 지나가고 나서야 유연은 그것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조금씩 정리해볼 수 있었다. 예전의 사랑은 마치 마음에 남은 흉터 같았다. 살짝 손끝으로 문지르면 아직도 욱신거리는 그 자리. 좋았던 날보다 헤어지던 마지막 날이 자꾸 떠올랐고, 함께 웃던 순간보다 무심히 멀어져가던 뒷모습이 더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요즘의 자신은— 누군가의 이름을 마음속에 오래 붙잡고 있으면서도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언가를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못한 채 고요하게 서 있는 중이었다. 보겸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기울었다. 어떤 말을 나누고, 어떤 눈빛을 주고받았는지 하나하나를 곱씹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유연은 알았다. 그건 아직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란 걸. 그저, 하루에 몇 번쯤 자기도 모르게 그 아이를 떠올리게 되는— 그 정도의 기울어짐. 아직은 무게가 되지 않는 감정.
유연은 자주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 번째 계절의 가사처럼, ‘조용히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라
는 말을 믿어보려고.
그러니까—
이건 사랑의 시작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사랑을 ‘잊는’ 방법일지도.
혹은, 오래된 사랑의 그림자와 조용히 인사하는 방식일지도.
마음이란 건 그렇게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변해가는 거니까.
유연은 여전히 매일 바쁘게 지냈고, 여전히 감정에 무뎌지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가끔은— 혼자만의 계절 속에서 조용히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런 밤이 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마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하지 않는 감정은 가장 오래 남으니까.
-세번째 계절.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