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 영어가 자유케 하리라
여기는 실전이다.
카투사로 선발되고 나서 평택에서 6주 KRTC, KTA를 거쳐 자대 배치 후 미군과 바로 근무를 하면서 나름 기대했던 그림들이 있었는데 TV에서 봐왔던 친절하며, 젠틀하고, 유머러스한 미국인들을 상상했지만 역시 기대는 기대로 끝내야 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한국땅이긴 하지만, 미국 주소가 적용되고, 미국의 군인과 미국의 가족 그리고 미국의 문화권 아래 놓여 있다.
미군은 Buddy 시스템으로 외출을 나가거나, 신병이 왔을 때 항상 둘 이상 무리를 지어 낯선 땅에서 혹시나 당할 위험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 시스템은 다양한 곳에서도 나타나긴 하는데 그렇게 하면 근무에 있어서도 누군가 나를 도와주고 나를 이끌어줘야 하는데 내 선임은 불과 1달도 안 되어 타부대로 전출 가고 내가 속한 Orderly Room(행정실)은 나 혼자 한국인이라 어디 도움을 구할 데도 없었고 내 동기들은 전부 선임들이 있는 곳에서 그래도 함께 근무했는데 난 철저하게 혼자서 근무해야 했다.
뭐 군생활이래야 한국도, 미국도 마찬가지겠지만 문제는 제일 중요한 게 언어 아니겠는가?
이게 민감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친절과 젠틀과 유머러스한 미국인을 기대하지만 이들은 개인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또 의무가 아닌 모병제로 왔기 때문에 여기가 돈을 버는 수단으로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본인들이 손해를 입거나 불공평하게 대우받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만약 업무 중에 한 번의 실수는 넘어가더라도 두세 번 반복적으로 실수가 일어나거나 말귀를 못 알아들을 때는 노골적으로 기피하고 업무에서 배제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업무도 단순 업무(서류복사, 청소사역, 각종 사역에 차출 등)로 빠지게 되고 고문관 하고는 다르지만, 지들끼리 수군거리고 정식 동료로 인정하기 힘든 분위기를 연출한다.
나도 처음에는 말귀를 잘 못 알아듣고, 그런 것이 반복되어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 쭈뼛쭈뼛하게 되면 오히려 그것을 더 안 좋게 보는 것도 있고 하여튼 육군에서 군복무하면 그래도 말은 통하고 내가 능력이 부족한 걸로 혼나면 그래도 이해를 할 텐데 여기는 의사소통 자체도 잘 안 되니 내 모든 능력이 그 언어 하나로 평가받는 것 같아 적잖이 자존심도 상하고 당황하기도 했었다.
게다가 저녁에는 또 카투사 선임들과 시간을 보내야 해서(그것이 꼭 집합과 기합의 나쁜 의미는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 이때는 또 한국어로 소통하다 보니 기대보다 영어가 잘 늘지 않는 합리적인 핑계도 대본다.
행정실에서 취급하는 서류도 많았기에 이게 무슨 서류인지 어디에 사용하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미군한테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알 때까지 계속 그들을 괴롭혀야 하는데 짬 찬 미군들은 그것도 귀찮아해서 초기에는 어떻게 적응을 해야 하나 하고 현타가 많이 왔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의 무게
근무 끝나고 밤에 다시 사무실에 와서 서류들을 보며 모르는 단어 사전으로 찾고 (당시 인터넷이 되지 않았고 스마트폰도 없었으니....) 가장 시급한 업무 영어를 하기 위해 계속 이미지 트레이닝과 말하는 훈련을 쌓았다.
지난 화에 잠깐 말했지만 내 영어 교사이자 룸메이가 되어줄 미군은 향수병으로 인해 먼저 고국으로 갔기에 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혼자 2-3달을 지냈다.
그렇게 해서 PT 테스트 주기, 평가, 사격평가 명단 짜기, 미군 상장, 표창장 만들기, 메모랜덤 만들기, 전화응대 (예상질문, 예상답변), 훈련 시 준비물 목록 만들기, 포대장 및 선임하사 서류 만들어주기, 기타 등등 조금씩 눈에 익히고 계속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안심이 될 때까지 붙들고 있으니 어느 순간 미군에게도 소문이 나서 Mr Kim이 매일 저녁에 사무실 와서 study 하고 돌아간다고 기특해했다.
Section Chief(분대장) 병장 존은 정통 행정병 출신은 아니어서 문서에 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 짬밥과 흑인 특유의 친화력과 또 리더십이 있어 아무도 잘 건드리지 못했는데 다행히 존은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고 존중해 주고 농담(?)도 가르쳐 주고 이것저것 친절하게 알려줬다. 물론 나중에 정이 떨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 큰 부분도 있었다.
남들은 쉴 때 혼자 사무실에서 서류와 영어랑 씨름하다 보면 내가 지금 이게 뭐 하는 것인가? 친구들이나 가족은 내가 편한 부대에 있어서 호강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매일 업무와 영어와 씨름하는데 이게 뭔 일인가? 물론 영어를 유창하게 해서 막힘이 없고 업무적인 부분에서도 탁월하면 내가 겪는 문제에서 자유롭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영어를 잘해도 여기는 군대이기 때문에 또 군대의 쪼를 이해하지 못하면 힘든 것은 매한가지다.
문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 들 일 때 그리고 그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피땀 어린 수고와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 단계씩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참 진부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 같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기존의 것(소위 꼰대스러움)을 부정하기를 좋아했지만 역시 고전과 클래식의 힘은 다른 것 같다.
그럼에도 그냥 무작정 걱정보다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부딪혀 보자 하는 마음이 더 컸고, 어렸을 때 전쟁영화도 많이 보고, 2차 세계대전 등 미군의 장비, 미군의 전술등을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어서 영화에서 보던 미군을 실제 같이 근무한다는 설렘도 공존하여 고통이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어렸을 때 나의 외가가 왜관에 있었는데 그곳에도 캠프 캐롤이 있고(어렸을 적에는 캠프 이름은 당연히 몰랐다.) 카투사가 되어 알고 보니 병참기지로 많은 물자가 보관되어 캠프 규모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크기였다. 왜관역에서 가끔 미군들을 보긴 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내가 커서 군복무를 그들과 함께 한다는 점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고 그저 내 눈에 신기하고 키 크고 잘 웃는 미국 청년들로 기억난다.
그때 아버지가 그들과 영어로 소통하며(아버지는 영문과 출신) 대화를 하는 것을 지켜봤는데 그런 기억들이 아무래도 나에게 쫄지않는 심장과 멘털을 주신 것 같다. 내가 영어가 서툴러도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막상 실무를 담당하니 답답한 게 한두 개가 아니어 정식으로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복 받은 군인이고 선택받은(혜택 받는) 군인이구나 느끼면서 남들은 돈 주고 어학연수 떠나가는데 오히려 군복무 하면서도 이런 기회를 누리니 어쩌면 이런 스트레스도 사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영어, 영어, 그리고 영어 Keep go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