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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28도

틀림이 아닌 다름

이번 추석은 처가족과 함께 경주로 3박 4일 동안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2019년부터 매년 추석과 설이 되면, 우리는 처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제주도, 베트남, 강원도 등 등. 그동안 참 많은 곳을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다녔다. 좋은 사람과 좋은 곳으로 여행 가는 것만큼 힐링되는 일도 없다.

이번에는 장모님께서 경주여행을 제안하셨다. 살면서 한 번도 안 가보셨다고 한다. 처가족 모두 흔쾌히 이번 추석은 경주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여행 당일, 와이프는 일을 좀 더 빨리 끝내고 와서 짐을 싸기로 했다. 나는 정상출근 후, 6시 30분쯤 퇴근했다. 집에 오자마자 땀에 쩔은 옷을 벗고 시원하게 샤워했다. 경주까지의 거리가 꽤 멀고 추석연휴의 시작이라 차도 막힐 것 같아서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갑자기 와이프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작은 아들 방으로 불렀다.


무슨 일인가 궁금했던 나에게 와이프가 말을 꺼냈다. "희성이가 코코, 코넛, 쿠키가 3일 동안 너무 더울 것 같다고 자기 방 에어컨을 켜고 가자고 하네." 와이프는 마뜩지 않은 표정이었다. 코코, 코넛, 쿠키는 얼마 전에 분양받은 크리스티드게코도마뱀들이다. 나는 잠깐 생각을 한 후, 말을 꺼냈다. "희성이가 우리보다 크리스티드게코도마뱀 전문가이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내 말 한마디에 둘째 얼굴에는 다행이다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마도 전기세에 민감한 엄마는 에어컨을 켜고 가지 말라고 한 것 같았다. 와이프도 내 말을 듣고 마지못해 순응하였다. 그 대신 너무 낮지 않은 온도인 28도로 맞추기로 하였다.

이것이 내가 가족들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가족원 중 누군가 무슨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그럴 수도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기준은 있다. 나를 해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이 조건을 지켜주면 거의 다 받아들이는 편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관대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내 생각에 필요 없는 육아용품을 사는 와이프에게 싫은 소리도 많이 했다. 일상에서 나만의 기준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는 아들들에게 잔소리도 많이 했었다. 내 마음이 수틀리면 화도 내고 짜증도 많이 냈었다.


어느 순간, 가족은 나의 소유물이 아니며, 각자의 생각과 성향이 다름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마도 오랜 시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나의 에고를 알아채고 그 알아차림을 통해 현존하는 법을 깨달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깨달음과 실천을 통해 내가 추구하고 있는 사랑받는 남편, 최고로 자랑스러운 아빠의 모습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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