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희찬아 일어나야지."라는 말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는 아들. 어제도 야구장직관을 다녀오느라 12시쯤 잤는데, 칼 같이 화장실로 향한다.
오늘은 한화이글스 2024 시즌 경기이자, 정우람선수의 은퇴식이 있는 날. 큰 아들이 원하고 원하는 경기를 예매하기 위해 온 가족이 나섰지만, 결국 실패.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근에 들어가 보니, 웃돈을 두둑이 올려서 팔고 있는 암표들. 큰 아들에게 슬쩍 물어본다. "희찬아, 당근에서 시즌 마지막 경기 티켓을 파는 데 살까?" "얼만데?" "1인당 7만원" "안돼. 그거 암표잖아." 온 맘 다해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던 나는 야들의 말에 적잖이 감동받았다. "그럼 온라인 예매 실패하면 포기하는 거야?" "아니, 현장예매 할 거야." "몇 시부터 줄 설 거야?" "아침 8시에 출발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 알았어. 아빠가 데려다줄게." 그랬던 아이가 토요일 경기를 보고 온 다음에 말이 달라졌다. "아빠, 안 되겠어. 지금부터 줄 서는 사람들이 있어. 6시에는 가야 될 것 같아. 아니, 아빠가 일어나는 대로 깨워줘." "오케이, 아빠가 5시에 깨워줄게. 한 번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보자."
새벽 5시, 아들은 외출준비를 하고 나는 빛의 속도로 베이컨말이 도시락을 준비했다. 경기장에 가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지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열정을 가지고 자신을 이겨내는 모습에 만감이 교차했다.
사실, 내일부터 아들의 중간고사시험기간이다. 일반적인 부모의 눈으로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어찌 중간고사를 코 앞에 두고 금, 토, 일 연속으로 야구경기를 보러 갈 수 있을까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나도 그랬었다. 학생이면 공부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5년간의 독서는 나의 몸과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행복한 삶에 정답은 없다. 단지, 사람마다 각자의 해답이 있을 뿐. 사회적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은 중요치 않다. 관객이 아닌, 배우로서의 내 삶이 중요하다.
"남과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이면, 뭐든지 해도 된다."
이것이 내가 아들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다. 사람이란, 스스로 선택을 해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이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그곳에는 배움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누군가, 특히 부모가 나서서 선택과 결정을 해주면 뒤탈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부모란 아이가 나이와 능력에 맞는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아이 대신 책임을 져주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가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아이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엄연히 다르고 구분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서로의 삶에 진심으로 응원하고 힘이 되어 줄 수 있다. 아이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는 경우는 딱 하나, 아이가 도움을 청할 때이다. 이 때도 아이에게 도움의 수준을 질문하며 도와줘야 한다. 부모가 생각하는 도움은 대부분 넘치기 때문이다. 부모는 먼발치에서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질문하고 경청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대관계이다. 잘못된 부분은 엄하게 교육하고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칭찬해줘야 한다. 무조건적인 칭찬과 인정은 부모로서 직무유기이다.
엄격함과 관대함의 조화를 밑거름 삼아, 아이는 자신과 타인의 삶을 구분하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올바른 인격체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