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씨네21>에 기고했던 <쓰리빌보드> 비평은 지면의 한계상 언급하지 못한 부분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생략했던 말들을 여기에 남깁니다
아래에는 기고했던 비평문이고, 그 아래에 추가 평이 이어집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맨드)는 광고 회사의 창가에서 뒤집힌 채 버둥거리는 벌레가 되살아나도록 도와준다. 그런 그녀의 귀에 웰비(케일럽 랜드리 존슨)의 말이 날아와 꽂힌다. 광고 기간은 부활절 전까지입니다. 전남편 찰리(존 호킨스)는 빌보드를 세운들 죽은 안젤라(캐서린 뉴턴)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광고의 내용은 딸을 죽인 범인에 관한 것이건만, 어째서인지 영화는 자꾸 무언가의 ‘부활’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하나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쓰리 빌보드>는 무엇의 부활을 기다리는가.
대답에 닿기 위하여 먼저 영화를 회상해보자. 빌보드 앞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딕슨(샘 록웰)이다. 그는 “마오!”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질문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쩔쩔맨다. 그는 늘 서툴고 어눌하게 말하지만 간혹 젠체하며 ‘환경보호법’ 혹은 ‘유색인종’ 같은 단어들을 언급한다. 이때 딕슨이 서툴게나마 어려운 용어를 구사하는 이유는 그가 다름 아닌 경찰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경찰서는 언어 권력의 공간이다. 민간인이 경찰서에서 욕을 하면 그들은 크게 화를 낸다. 이곳의 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는 마을에서 좋은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실상 그의 언어 사용 방식은 의뭉스럽다. 그는 규칙을 내세우며 실체를 가리고 이를 우아한 언어로 포장하길 좋아한다. 범인 추적에는 ‘인권법’을, 딕슨의 고문 혐의에는 ‘확증’을 운운하는 식이다. 그의 캐릭터를 단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낚시 게임에 관한 장면이다. 윌러비는 담요를 벗어나선 안 된다며 아이들이 발음하지도 못하는 어려운 용어들로 규칙을 설명하고, 뒤에서는 아내와의 은밀한 섹스를 즐긴다. 그가 죽기 전 뇌까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실상은 음담패설에 다름 아니다. 밀드레드는 이런 위선적인 언어들을 파헤쳐서 그 속에 숨겨진 실체를 찾으려고 한다. 암에 걸렸다고 하면 알고 있다고 받아치고, 낯선 남자가 던지는 폭력적인 질문에는(“내가 그 강간범일까?”) 진실을 따져 묻는다(“진짜야?”). 그녀의 곁에는 늘 진실의 말을 감당하는 자의 비애감이 감돈다. 그녀의 유일한 실수는 언어의 엄중함을 더 일찍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딸에게 내뱉은 실언은 잔인한 현실로 되돌아온다.
그런 면에서 밀드레드는 딕슨의 어머니와도 만난다. 여자친구(woman)가 없다는 딕슨의 말에 딕슨의 엄마는 알고 있다(yeah, I Know)고 짓궂게 대답하고(이는 딕슨이 동성애자임을 알고서 조롱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유독 깔깔대며 오래 웃는다. 집을 떠나는 아들의 모습 위로 그녀의 웃음소리가 오버랩된다. 그 후 딕슨은 폭행을 당한 채 피를 흘리며 집에 되돌아온다. 무심코 던진 폭력의 언어는 현실의 폭력으로 되살아나 그녀들을 오열케 한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언어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어린 여자들이다. 페넬로페(사마라 워빙)는 자신을 비하하는 맥락을 모른 채 동물원에서 해고된 사정을 열심히 설명하고, 광고사 여직원은 잘했다는 빈말에 진심으로 기뻐한다. 원뜻 그대로 언어를 구사하는 그들의 천진난만함은 밀드레드의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사건의 범인으로 서장 윌러비를 의심한다. 밀드레드가 딸 안젤라에게 강간을 언급하는 장면 뒤에 윌러비는 아내의 엉덩이를 더듬고 있다. 윌러비가 딸들을 재우는 장면과 아내에게 키스하는 장면은 너무 긴밀하여 당황스럽고, 아내는 윌러비를 두고 “아빠”라고도 부른다. 영화는 자꾸만 어린 여자들과 윌러비를 성적으로 연결 짓는다. 그는 결국 언어의 권위가 배제되는 마구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언어의 냉혹함을 온몸으로 깨우친 밀드레드가 복수의 수단으로 광고를 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빌보드는 공중에 떠다니는 실체 없는 언어를 단단히 붙잡아서 그것을 붉고 거대한 실체로 돌려놓는다. 온 마을은 혼비백산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품위 있는 언어 뒤로 도피한 마을 사람들을 끌어내어 사건의 진실을 똑똑히 목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때 빌보드의 붉은색은 진실을 까발리는 외설의 색인 동시에 안젤라의 몸에 붙었던 불의 귀환이다. 이때부터 빌보드의 붉은 이미지는 마치 주술처럼 차례로 다른 것에 옮겨간다. 윌러비는 빌보드가 언급될 때마다 피를 흘리고, 결국 얼굴의 메모지를 피로 붉게 물들이며 마치 빌보드가 얼굴을 덮친 것 같은 형상으로 죽음을 맞는다. 붉은 이미지는 빌보드에 붙은 불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결정적 장면과 마주한다. 까맣게 타버린 빌보드와 활활 타오르는 다른 빌보드. 밀드레드는 그 사이를 온몸으로 내달린다. 위선과 권위의 언어에 맞서 저항하던 그녀의 힘겨운 싸움은 이제 거대한 불길을 향해 질주하는 실루엣으로 드러난다. 그 무모하고 치열한 움직임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비장하고 아름답다. 밀드레드는 경찰서에 불을 내고, 마침내 경찰서는 붉은색의 ‘안젤라 파일’을 세상 밖으로 토해낸다. 그 후 화상을 입고 입원한 딕슨은 웰비와 마주친다. 이때 딕슨의 시선을 오래도록 담아내는 시선 숏을 기억해보자. 이 영화에서 폭력을 응시하는 자들은 주로 흑인이며 딕슨은 과거 흑인을 고문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 본인이 고문한 자의 자리에서 본인이 폭행한 자를 응시하고 있다. 이 잔인한 자리바꿈은 끝내 딕슨을 변화시키며 그로 하여금 피해자의 자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밀드레드가 문구멍을 통하여 흑인 제롬을 내다보던 자리에 딕슨이 서서 인사하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딕슨은 범인을 잡기 위하여 온몸으로 폭력을 받아내고, 마침내 자신의 피 묻은 손 사이에서 단서를 찾는다. 그러나 결과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영화는 진실을 폭로하던 붉은색은 이제 잠들어버렸음을 보여주며(붉은 조명 아래 잠든 딕슨의 어머니와 붉은 티를 입고 잠든 아들 로비) 길었던 여정의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 완연한 실패 앞에서 마침내 부활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딕슨이 되찾은 배지에 힌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피 흘리며 범인을 찾고 나서야 잃어버렸던 경찰 배지를 되찾는다. 이것은 밀드레드가 빌보드를 통하여 마침내 회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영화는 무너지는 언어 속에서 몸을 던져 실체를 찾는 자만이 새로운 길을 떠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부활하는 것은 아마도 그 길을 떠날 수 있는 자격일 것이다.
<쓰리 빌보드>는 교묘한 말들로 실체를 옭아매는 세상에 대하여 마틴 맥도나가 선사하는 언어의 서부극이다. 그들은 쏟아지는 언어 속에서 자신만의 정의를 향하여 뚜벅뚜벅 나아간다. 떠나가는 밀드레드와 딕슨의 모습 뒤로 빌보드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자신이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는 밀드레드의 고백에 딕슨은 뻔한 소리라고 응답하고 밀드레드는 환한 미소로 화답한다. 그들은 이제 남자를 죽이는 것에 확신이 없다. 아마도 남자의 공허한 말들을 의심하는 것이리라. 밀드레드는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하지만 그들의 답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영화는 잠자코 길을 가는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끝이 난다. 영화의 영향인가. 내게 <쓰리 빌보드>는 무수히 나부끼는 언어들 속에서 처절하게 빛나던 단 몇 장면으로 남았다. 그러므로 어찌하여도 이들을 언급하며 글을 끝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불붙은 빌보드 사이를 내달리는 밀드레드, 피 묻은 손을 떨며 글씨를 새겨 넣는 딕슨, 마지막에 그들을 감도는 무심하고 평온한 공기. 두말할 것 없는 걸작의 탄생이다.
1. 캐릭터와 언어의 사용
밀드레드
먼저 밀드레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체를 가리는 언어에 맞서 싸우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이 세계의 언어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광고를 하기 전에는 먼저 법적으로 '쓸 수 없는 말'이 무엇인지 묻죠. 이 웰비는 "ass"를 언급합니다. 밀드레드는 좋다고 대답합니다. 합법의 언어에는 법에 맞춰 대응하는 것이죠. 반면 친구가 잡혀간 것에 화가 나서 경찰서에 갔을 때 그녀는 큰 소리로 "ass"가 들어간 욕을 합니다. 이것은 언어의 두 가지 층위(합법적 언어 / 비속어) 모두를 동원하여 싸움을 진행하겠다는 태도로 보입니다.
밀드레드와 윌러비의 대화는 두 언어의 싸움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윌러비가 "사실 난 암에 걸렸어"라고 말을 하는 것은 곧 광고를 내려달라는 의미죠. 그러나 밀드레드는 그런 맥락을 거부하고 "알아"라고 대답합니다. 죽으면 효과가 없다는 말도 덧붙이죠. 광고를 둘러싼 화제의 맥락을 '자신의 건강' 쪽으로 끌고 오려는 윌러비의 시도를 무마시키고 '범인 수사' 쪽으로 다시 가져가는 것입니다.
반면 흥미로운 것은 이런 밀드레드 조차도 자식들을 대할 때는 말장난을 친다는 것인데요, 딸이 화가 난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차를 빌려줄 생각도 없으면서 "차를 빌려줄지 물어보라"고 말했기 때문이죠. 그녀는 아들의 말에도 의도를 피하며 말을 돌리는 행동을 자주 합니다. "old cunt"라는 욕에서 화가 나야할 부분은 "cunt"인데도 나는 늙지 않았다("I'm not old")라고 받아치고, 새들도 암에 걸리냐는 말에는 개들은 걸리더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늘 직설적인 진실의 말을 던지던 모습과 대비되는 모습인데, 이것은 그녀가 자식에 대하여 부모로서 언어 권력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밀드레드의 눈은 자주 진실을 향합니다. 그녀가 경찰서에서 맞은편 광고사의 직원과 레드를 보는 순간 역시 의미심장하죠. 이런 맥락에서 레드는 이성애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딕슨의 추측과, 영화상에서 나오는 근거들(이것들은 관객을 속이는 역할을 합니다)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성애자가 아니며 밀드레드는 이 진실을 간파하고 미소 짓는 것입니다. 그 장면 뒤에 밀드레드는 다시 한 번 진실을 바라봅니다. 딕슨을 향하여 흑인 고문을 언급하는 것이죠. 딕슨은 자신은 고문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인종 차별에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거짓입니다. (영화의 초반에 딕슨을 보고 익숙한 얼굴이라며 침을 뱉는 제롬의 행동으로 보아 그가 고문한 상대가 제롬일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그렇게 볼 때 문구멍을 통하여 제롬이 보이던 자리에 딕슨이 서 있는 것은, 그가 피해자의 자리로 옮겨왔음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겠죠.)
윌러비 서장
윌러비 서장의 경우 소위 말하는 '좋은 말'들로 상황을 얼렁뚱땅 넘기는 행동을 자주 합니다. "고문 경찰을 모조리 내보내면 인종 차별적 경찰들만 남는다"(기억상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같은 말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언어의 외면을 중시하기에 아내가 음담패설 끝에 '오스카 와일드'를 언급하는 것을 듣고서 매우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가 권위적이고 위선적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이유는 그가 이 마을의 공권력의 핵심인 서장이기 때문입니다. 경찰들은 위선적 언어에 능하기에 말장난도 자주 하죠. "그냥 물어본거지 명예훼손한 게 아니야" 같은 대사가 대표적입니다. 그 말은 실체와 상관없는 언어 규칙을 내세워서 상황을 모면합니다. 이런 언어 사용은 상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대답하는 페넬로페와 비교하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윌러비 역시 언어 사용을 조심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딕슨을 대할 때인데요, 그는 딕슨과 대화할 때 욕도 곧잘 합니다. 그가 언어의 대외적 모습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그에게 딕슨은 유사 아들과도 같은 내부자이기에 자신의 언어를 검열하지 않는 것입니다.
딕슨
딕선의 경우 본인 스스로 말하듯이 언어를 잘 구사하지 못합니다(어릴 때 영어를 못해서 노력했다는 대사). 그는 "눈이 이상한 아주머니"같은 표현을 썼다가 서장의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고, 마지막에 새로운 서장이 남자가 복무한 곳에 대한 힌트를 줘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윌러비 서장이 고 맥락을 사용하는 언어의 권력자인 반면, 딕슨은 이런 맥락들을 간파하지 못합니다. 그가 언어에 서툴다는 점은 영화에 등장하자마자 바로 제시되죠. 빌보드에 대한 질문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서 웃긴 상황을 만들어 내니까요.
밀드레드는 치과에 들러서 치과 의사의 손톱에 피를 냅니다. 이 장면은 거의 유일하게 밀드레드가 직접 행한 폭력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 뒤 밀드레드는 잠시 말투가 어눌해집니다. 이는 왜 딕슨의 말이 늘 어눌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의 말투가 늘 느리고 어눌한 것은, 그가 과거에 수많은 폭력을 자행해 왔음을 짐작케 합니다.
반면 딕슨이 언어에 서툴다는 점은 그가 밀드레드의 유일한 동료가 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그가 서장의 편인지, 진짜 범인을 찾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적어도 후반부터) 위선적인 언어를 버리고 직접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어에 서투른 점이 밀드레드에게는 오히려 친근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말만 번지르르한 인물을 가장 혐오하니까요. 같은 이유로 그녀는 페넬로페의 순진한 태도에 자주 분노를 누그러뜨립니다(집에서 찰리와 싸울 때, 레스토랑에서 찰리를 만났을 때).
딕슨과 밀드레드의 관계를 암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딕슨은 불타는 경찰서에서 이어폰을 끼고 서장의 유언을 읽는데요, 이어폰과 유언의 영향으로 딕슨은 주변에 불이 난 것도 모릅니다. 이때 딕슨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는 것은 밀드레드의 화염병입니다. 화염병에 맞아 그 자리에 쓰러지며 귀에서 이어폰이 빠지고 딕슨은 뒤를 돌아보며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죠. 밀드레드의 행동이 딕슨으로 하여금 새로운 소리를 듣고 새로운 것을 보게 할 것임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그 다음 장면에서 영화는 웰비를 보는 딕슨의 시선샷을 오래 보여줍니다. 딕슨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의 시선에서 화면은 네 귀퉁이가 붕대로 가려져 동그랗게 보입니다. 이후 이와 동일한 형태의 시선샷이 한번 더 등장합니다. 그것은 문구멍으로 문 밖을 내다보는 밀드레드의 시선숏입니다. 이때 화면은 딕슨의 때와 같이 동그랗게 표현되고, 이 장면은 딕슨의 시선숏에 뒤에 연이어 등장합니다. 둘이 유사한 시각을 가지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시선숏의 연대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둘은 그 후에 부쩍 가까워지죠.
영화에서 딕슨이 화재 이후 갑자기 웰비에게 사과하고 밀드레드와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의문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를 서사적으로 해석한다면 사랑을 가지라는 윌러비의 유언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딕슨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는 밀드레드의 화염병, 딕슨의 시선숏, 밀드레드의 시선숏, 그 자리에 등장하여 밀드레드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딕슨의 순으로 영화적인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밀드레드가 딕슨으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자리에 서게 하며, 이를 유사한 시선숏의 연속으로 다시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서장
새로운 흑인 서장은 경찰서의 분위기를 단번에 파악합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글자가 안 보이냐가 아니라 글자를 못 읽냐고?"라고 되물으며 경찰의 오만한 언어 사용을 지적합니다. 서장임을 증명하라는 말에는 "꼭 보아야 알겠냐"고 호통을 치기도 하죠. 위선적 언어, 불필요한 절차를 버리고 실체를 보라는 뜻입니다. 이 맥락 역시 알아듣지 못하고 입증을 요구하는 딕슨은 그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그러나 그 역시 서장의 신분에서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딕슨에게 '기밀'을 언급하며 장소에 대한 힌트를 던지죠. 이는 '인권법'이나 '확증'을 운운하던 윌러비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그러나 그가 조금 다른 면이라면 실질적인 단서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맥락적 언어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딕슨은 당연히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중고차 세일즈맨 제임스
제임스는 '선의의 언어'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밀드레드를 만났을 때부터 "인터뷰에서 조리 있게 말하더라"고 칭찬을 하죠. 언어를 이용해서 싸우고자 하는 밀드레드의 욕망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또한 "밀드레드는 화재 당시 자신과 있었다"는 거짓말을 반복해서 하고, "사다리를 잡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모두 밀드레드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의 선한 언어 사용은 단연 돋보입니다. 그런 그도 상처받고 난 후에는 밀드레드에게 "웃지도 않고 경찰서에 불을 지른 여자"라며 선의의 거짓말이 아닌, 아픈 진실의 말을 쏟아냅니다.
범인으로 의심받는 낯선 남자
이 남자는 제임스와 대비되게 '위악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밀드레드를 찾아와서 "내가 죽은 윌러비의 친구라면?", "내가 그 강간범이라면?" 이라며 실체 없는 악한 언어들을 쏟아냅니다. 그는 위악의 언어를 쏟으며 상대를 조롱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와중에도 밀드레드는 꿋꿋이 진실을 따져 묻습니다("진짜야?").
그는 토끼 인형이 7달러라는 말에 그 인형을 부수고서 이젠 아니라고 하죠. 그는 눈에서 사라지면 가치 또한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이 말이 딸을 잃은 밀드레드에게 얼마나 잔인한 폭력인지 아시겠지요. 그는 지금 죽으면 끝 아니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 로비
아들 로비는 엄마와 달리 진실을 보면서도 그것을 외면합니다. 그는 안젤라 케이스 파일도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안젤라가 죽기 전 아빠와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전남편 찰리의 말에 밀드레드는 진짜냐고 따져 묻습니다(그녀는 또 한 번 진실의 말을 요구합니다). 이때 로비는 모르겠다고 말하죠. 그러자 밀드레드는 "알잖아, 로비"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자주 진실을 외면함을 알고 있는 것이죠.
2. 윌러비가 이 세계의 가해자이자 책임자인 이유
글에서 윌러비에게 '범인'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직접적인 범인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더 넓게는 이 세계의 가해자이자 책임자임을 의미합니다. 영화가 주로 보여주는 쪽은 후자입니다. 제가 그렇게 판단한 근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밀드레드가 딸에게 "강간이나 당해라"고 말한 것을 후회하는 장면 뒤로 윌러비는 아내의 엉덩이를 더듬고 있습니다. 또한 윌러비는 침대에서 딸들의 눈을 감겨주며 재우죠. 그 뒤의 장면에서 윌러비가 아내에게 키스를 하는데요, 이때 잠든 아이의 얼굴과 키스하는 윌러비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너무 긴밀하기 때문에 모종의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물론 아내가 "아빠"라고 언급하는 것 역시 윌러비와 어린 여자들 사이의 성적인 긴장감을 은밀하게 암시합니다.
이것은 경찰과 어린 소녀들 간의 관계의 특성으로도 보입니다. 19세의 페넬로페 역시 전직 경찰 찰리와 관계를 맺으니까 말이죠.
윌러비는 아이들에게 낚시 게임을 시킨 뒤 뒤에서 부인과의 섹스를 즐깁니다. 이때 언어에 미숙한 아이들과 어려운 용어를 구사하는 윌러비의 대조적인 모습은 이 마을 전체의 모습으로 확대됩니다. 곧 불필요한 규칙과 권위적 언어로 사람들을 제자리에 묶어둔 뒤(실제로 그는 범인 검거를 얘기할 때마다 '인권법', '확증' 같은 절차를 요구하죠) 뒤에서 자신의 쾌락을 즐기는 모습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 후 윌러비가 죽고서 아이들이 떠난 강가에는 곰인형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그다음 장면에서 인형에 돋보기를 대고 쳐다보는 딕슨의 모습으로 곧장 연결됩니다. 딕슨이 돋보기로 관찰하는 대상은 주로 피해자일 것인데, 이는 윌러비가 자신의 시간을 즐기는 사이 피해자가 발생하였음을 드러냅니다.
윌러비는 딕슨더러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데요, 실은 딕슨은 인종차별자이자 흑인 구타 혐의를 가진 사람입니다. 유책 한 사람이죠. 온 마을이 윌러비더러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윌러비 역시 무결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딕슨은 "서장님을 따라 사람들을 돕겠다"는 말과 동시에 레드를 흠씬 두들겨 패서 창문 밖에 던지기도 합니다. 윌러비가 폭력에 대한 책임이 있음이 여러 번 암시되는 것입니다.
윌러비의 유언 역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딕슨에 대한 그의 유언들은 대부분 사실과 어그러집니다. '행운이 있으리라'는 말과 동시에 딕슨은 화염병을 맞고, '차분하게 행동하면 형사가 될 수 있으리라'고 말하지만 딕슨은 해고되며 범인 검거에 실패합니다. 밀드레드에 대한 유언 역시 유사합니다. '술집에서 범인이라고 떠드는 놈을 잡아서 범인을 검거할 수도 있다'는 말 역시 사실과 다르죠. 유언을 시작하며 '죽은 사람 윌러비'라고 하는 부분도 따지고 보면 사실이 아닙니다(살아있을 때 쓴 편지). 비평에서 언급하였듯이 자신의 죽음이 빌보드와 관련이 없다는 말 역시 이 영화적 세계의 진실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유언들은 대부분 거짓말이며 '범인을 찾고 싶었고, 찾을 수 있을 것이다'는 말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수사를 했을지언정 규칙과 권위의 언어로 옭아맨 세계를 해방시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죠.
이 세계에서 어린 소녀들은 대부분 언어적으로 무력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녀들은 엄마의 농담에 걸려들기도 하고(차를 빌려달라고 해봐) 맥락에 숨긴 뜻을 읽지도 못합니다(페넬로페와 광고회사 여직원). 언어 권력이 실질적인 권력과 동일시되는 이 세계에서(언어 사용에 능한 경찰과 밀드레드는 강한 존재) 그녀들은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딕슨의 고문 혐의를 모른척하고, 경찰의 폭력을 농담으로 넘기고, 위선적 언어로 상황을 모면하는 윌러비는 이 폭력적인 세계의 체제 유지자이며 가해자이자 가장 큰 책임자일 것입니다. (여기에 서장과 어린 여자들 간의 성적인 연결을 암시하는 영화의 장면들까지 고려하면 그를 사건의 직접적인 범인으로 볼 여지도 있기에 '범인'이란 표현을 썼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것이 글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3. 언어의 서부극
영화는 밀드레드의 싸움에 서부극의 정취를 연결시킵니다. 밀드레드가 빌보드의 불을 끌 때도 서부극의 음악이 깔리죠.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경찰서에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이때 경찰서를 향해가는 밀드레드의 뒤로 서부극의 음악이 들려옵니다. 그녀가 뚜벅뚜벅 걸어가서 한 행동은 경찰들에게 욕을 하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공권력의 언어 규칙을 깨부수는(경찰서에선 욕을 해선 안 된다는 모종의 규칙) 언어의 서부극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밀드레드는 빌보드가 불탄 후 침대에서 일어나서 토끼 신발을 가지고 인형극을 하죠. 그녀는 귀여운 두 개의 토끼 신발을 가지고 서부극에 나올 법한 대사들을 읊습니다(그 놈들에게 복수할 거야? 그럼 복수해야지). 이 장면에서 서부극의 요소를 가진 것은 오로지 밀드레드의 말입니다. 이 영화가 언어를 통한 서부극임이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만일 이 세계가 진짜 서부극의 세계라면 밀드레드는 직접 범인을 찾아서 욕을 퍼붓고 총질을 해댈 것입니다. 자신만의 정의를 직접 찾아 나서는 것이죠. 그러나 이 세계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인권법, 확증, 기밀 같은 규칙에 가로막혀 있으며, 거친 언어를 쓰는 것은 교양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밀드레드는 "변호사와 광고 회사를 신뢰할 수 없으면 미국이 어찌 될지"라고 말하죠. 이것은 마틴 맥도나가 생각하는 지금의 미국 사회와 직결됩니다. 실체와 상관없는 광고가 판치고, 언어로 실체를 가리는 변호사들이 승리하는 세계. 그렇기에 밀드레드는 싸움의 도구로 언어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경찰서의 전면에 광고 회사가 있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죠. 밀드레드는 광고와 비속어 모두를 사용하며 이 세계의 싸움을 이끌어 나갑니다. 이것은 서부극이 불가능해져 버린 세계에서 마틴 맥도나가 언어로서 되갚아주는 서부극인 셈입니다.
4. 실패에서 시작하여 실패로 끝나는 이야기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실패한 때로부터 활동을 시작합니다. 엄마는 딸이 죽고 나서야 범인을 찾기 시작하며, 딕슨은 해고되고 나서야 진짜 수사를 시작합니다. 이런 시도들도 물론 실패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밀드레드가 유일하게 기뻐하는 순간이 언급되는데요, 그것은 딕슨이 범인을 쫓던 순간입니다. 이 영화는 허울뿐인 규칙들을 뒤로한 채 몸을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인 것이죠.
딕슨은 영화상에서 웰비를 폭행하고 나서 경찰 배지를 잃어버립니다. 서장에게 그때 잃어버린 것 같다는 말을 합니다. 그 후 술집에서 남자로부터 폭행을 당할 때까지도 딕슨은 배지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는데요, 이후 어디서 찾았다는 말도 없이 그는 배지를 되찾아 경찰서에 반납합니다. 곧 어디선가 찾긴 찾았다는 것인데, 이 시기는 그가 화장실에서 피 묻은 손을 떨며 범인의 신상을 적던 순간으로 수렴됩니다. 즉, 그가 실제로 배지를 어디서 찾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몸을 던져 실체를 찾는 순간에 영화가 그를 경찰로서 복권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밀드레드가 빌보드를 둘러싼 힘겨운 싸움에서 무엇을 회복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이제야 엄마로서 박탈된 자격을 되찾고 과거를 정리하고서 새로운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딕슨과 밀드레드가 차를 타고 떠나던 순간, 밀드레드는 자신이 방화범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때 딕슨은 "뻔한 소리"라고 말합니다. 딕슨이 이토록 누군가의 의중을 파악하며 원만하게 소통하는 모습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딕슨의 모습에 밀드레드도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죠. 몸으로 세계를 뒤흔들며 활동하는 사람들이 연대하는 순간입니다. 마지막에 그들을 감싸는 평화로운 공기는 마틴 맥도나가 그들에게 선사하는 작은 상찬과도 같습니다. 동시에 이 장면은, 어째서 우리가 무수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매일 집을 나서서 뚜벅뚜벅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쓰리 빌보드>는 실패로 시작해서 실패로 끝나버린 활동을 오롯이 긍정하며 끌어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쓰리 빌보드>를 잊기 힘든 이유겠지요.
※ 비평에 등장하는 추측들은 당연히도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언급들을 한 것은 영화를 보는 새로운 재미가 되시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글이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가로막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