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화 비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y 25. 2024

도파민, 정말 줄이는 게 답일까?

자극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도파민에 절여진 나의 뇌를 고백한다.

3시간, 5시간 끊이지 않고 집중했던 것은 이제 남의 얘기. 크고 작은 자극이 범람하고, 나의 뇌는 그것들을 부지런히 섭취했다. 여기서 자극은 '정보'에 한정된 것이다. 마라탕후루 같은 먹는 것 말고.


정확히 말하자면, 뇌가 자극에 취약해졌다.

이전에는 엔간한 자극과 방해에도 집중을 유지했지만, 이제는 작은 자극에도 반응한다. 왜왜, 먼데먼데. 마치 굶주린 사람이 음식 냄새에 반응하듯이.



그런데 웃긴 것은 이것도 트레이닝의 결과라는 점이다. 나의 직장은 새로운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잘 못했다. 한 가지 업무를 하다가, 거기서 즉시 손을 떼고, 다른 일을 처리하는 것. 혹은 여러 가지를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


그래서 노력하며 익혔다. 무엇을? 한 가지 일을 하는 와중에, 다른 일도 신경 쓰는 법을. A를 잡고 있다가도 B, C, D에 옮겨가며 여러 이슈에 대응하는 법. 이것은 한 마디로 집중력의 벽을 허무는 작업이었다. 몰입의 순간에 자연스레 생성되는 방어벽을 낮추고, 다른 업무로 전환하기 쉬운 상태로 만든다. 이렇게 뇌를 바꾸는 훈련을 한 셈이다. 여러 가지 업무 사이를 빠르게 오갈 수 있도록 집중력의 허들, 생각의 문턱을 낮추는 훈련.



묘하게도 이것은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 학교에서 트레이닝한 것을 해체하는 작업이었다. 왜, 학생 때는 집중력을 높이라고 훈련받지 않나. 그래서 한 가지 공부에 몰입하며 주변의 방해를 쳐내고,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공부를 할 때와 일을 할 때, 내게 요구되는 능력이 달랐다. 전자는 자극에 둔감해질 것을, 후자는 자극에 민감해질 것을 요청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었고, 나의 뇌도 그에 맞춰 변화했다.



그런데 이런 환경 변화가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학교와 직장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은 우리 전부에게, 전 사회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가령 우리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보아야 하는 것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 보자.

유행하는 짤, 숏폼. 영화나 드라마도 요약 영상으로 소비된다. 우리가 취득하는 정보는? 1~2분 정도만에 빠르게 볼 수 있는 짧은 정보, 찌라시. 짧은 정보를 더 요약한 정보. 자극은 더욱 짧아졌고 강력해졌다. 


대신 훨씬 많아졌다. 하나의 정보들이는 시간은 줄어든 대신, 전체적인 양은 많아졌다. 작은 조각의 자극들이 광활하게 범람하는, 우리는 그야말로 자극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이런 현상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정보와 자극의 환경이, 이렇게나 변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면 자극에 민감해진 우리의 뇌는, 실은 변화한 환경에 적응한 것일 수 있다. 우리에게 던져진 정보를 최대한 많이, 빨리 처리하기 위해 최적의 형태로 바뀐 것이다.



최근 도파민에 절여진 우리의 환경을 비관하며, 도파민을 무조건 터부시 하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다. 도파민 디톡스가 답인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도 일부 있다. 만일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하냐'라고 묻는다면, 이런 태도가 답일지 모른다. 끊임없이 도파민에 중독시키면서 뇌를 괴롭히는 사회가 어떻게 바람직할까. 의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과한 자극은 피하는 것이 답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은, 자극 권하는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개인에 대한 이해가 없다. 우리는 때로 건강하지 못한 것들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야근을 하는 것, 싫은 사람과 참고 잘 지내는 것,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 모두 건강하지 않지만, 우리는 종종 그냥 한다. 우리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니까.  

 

도파민도, 자극도 마찬가지다. 홀로 산에 가 편하게 산다면, 사회생활을 포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간단한 문제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개인에게 무수히 많은 자극을 던지는 방식으로 이미 변했다. 주변 사람과 수다도 떨고, 경험도 나누며 어울려야 하는 우리는 이런 자극을 모두 무시하며 살 수 없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라기보다, 필요의 문제다.



그러니 "자극적인 것을 멀리하게요" 같은 조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어렵다. 일단 참기 힘들고, 참았을 때 사회적으로 단절된다는 측면에서 불가능하다.


물론 사회는 도파민 추구형 자극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하지만 이걸 개인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버거울 정도로 큰 인내심이나 희생을 요하는 일이다. 여러 자극과 정보가 오가는 지금 시대에 '자극 민감성'은 새로운 생존 능력이다. 그것을 버리라는 것은 생존 스킬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잠깐 상상해 보자. 당신은 바다에 놀러 갔다.

해변가를 거닐 때는, 발이 젖지 않게 조심해야 된다. 발목이 잠길 정도로 물에 들어갔다면,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리면 된다. 몸이 잠길 정도라면,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 만약 바다 한가운데 있고 큰 파도가 수시로 넘실거린다면? 보드에 올라 파도에 몸을 맡기는 서퍼가 되어야 한다.


상황에 따라 필요한 에티튜드가 다르다. 그리고 우린 지금 자극의 바다 위에 있다. 그곳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파도가 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금도 젖지 않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파도에 먹히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즐기는 태도다. 


도파민 중독도, 도파민 완전 차단도 답이 아닌 것 같다. 변한 환경을 인정하며, 새로운 적정선을 찾을 시간이다. 적당히 섭취하되,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쓰고 보니 뻔한 말이라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뻔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 '적정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린 어디쯤에 선을 그어야 할까?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여전히 찾고 있는 중이라. 분명한 것은, 누구도 그걸 대신 찾아줄 수 없고 스스로 탐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맞다. 우리는 지금 자극의 파도 속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맞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직 부적응자' 응시하는 <기생수>, <댓글부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