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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y 25. 2024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법,<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스브스 프리미엄'에 기고한 글입니다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링이 있습니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스틸컷

간단히 말하자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끝내주는 영화다. 극장을 나서며 긴말 필요 없이 "끝내준다"고 되뇔 수 있는 영화는 드물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그런 영화다. 아름다운 디스토피아를 구현한 배경, 단순한 듯 탄탄한 스토리, 꼭 맞는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액션이 발군이다.


<매드맥스> 시리즈의 시그니처인 자동차 추격 신은 진화했다. 전작인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 긴 막대(폴 캣)를 이용한 전투신이 나왔다면, 이번에는 날면서 공격하는 신이 등장한다. 액션만 보더라도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볼거리 이상으로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는 영화니까. 조지 밀러가 이 영화를 통해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겠다. 아래부터는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링이 있으니, 유의해 읽어주기를 바란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스틸컷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 황폐한 도시 시타델? 그곳을 지배하는 임모탄? 광기에 찬 전사들? 희망을 찾는 여자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내용이 빠졌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이야기'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먼저 이 영화의 형식을 떠올려보자. 1장, 2장 등으로 챕터가 나뉘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현실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떠올리게 만든다.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영화와의 차이다.


또 영화 안에 대놓고 '이야기꾼'이 등장한다. 그는 주인공들의 주변을 맴돌며 쉼 없이 이야기를 만든다. 그의 모습은 영화의 감독, 조지 밀러와 겹친다. 그러면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조지 밀러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속 캐릭터도 이런 측면을 강화한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캐릭터가 많다.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는 성모 마리아를 연상케 한다. 퓨리오사의 어머니 메리(찰리 프레이저)가 죽을 때, 메리는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같은 형상이다. 이때 천을 덮어쓴 채로 어머니를 지켜보며 울부짖는 퓨리오사는 성모 마리아와 비슷하다. 이런 설정은 설득력이 있다. 메리는 퓨리오사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메리(예수)는 퓨리오사(성모 마리아) 때문에 만들어진 셈이다. 그러므로 상황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퓨리오사는 성모 마리아와 겹친다.


또 디멘투스(크리스 햄스워스)는 '토르'를 연상시킨다. 물론 그가 마블 시리즈에서 토르 역을 맡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단순히 배우가 같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어느 순간 디멘투스의 망토가 붉게 물들였을 때, 그의 모습은 붉은 망토를 입은 토르와 겹친다. 디멘투스가 늘 들고 다니는 마이크는 토르의 망치와 비슷하다. 힘의 상징이며, 적을 공격하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챕터로 나뉜 진행. 이야기꾼의 등장.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가져온 것 같은 캐릭터들. 이 외에도 판타지에 가까운 환상적인 연출까지. 이런 점들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현실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이런 경향은 조지 밀러의 전작인 <3000년의 기다림>(2023)에서도 나타났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를 보며, 우리는 조지 밀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감상하고 있는 셈이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스틸컷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조지 밀러는 한 가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진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고민할 법한 질문이다. 디멘투스에 대한 분노로 타오르는 퓨리오사. 그녀는 드디어 죽은 어머니의 원수, 디멘투스를 포획하고 제 앞에 무릎 꿇게 만든다. 퓨리오사는 디멘투스를 흠씬 두들겨 팬다.


이때 디멘투스가 말한다. "소용없어.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아. 너는 앞으로 이 분노를 잊기 위해, 폭력적인 자극만을 반복하게 살게 될 거야"(내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대사이므로, 영화 속 대사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디멘투스는 퓨리오사에게 묻는다. 자극에 대한 충동을 잠재우고,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겠느냐고.


이 물음은 사람을 멍하게 만든다. 예상을 뒤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지 밀러에 따르면, 단순히 자주 등장한다고 주인공이 아니다. 진정한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뭘까.


이건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 같다. 자극에 뒤덮인 채 사는 요즘이다. 특히 보는 것이 그렇다. 잘 짜인 이야기보다는, 도파민이 잔뜩 묻은 영상 조각들을 섭취한다. 하루를 보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나의 하루를 이야기처럼 운영하지 못하고, 자극으로 본능만을 채우며 산다. 그런 태도로 주인공이 될 수 있겠느냐고 조지 밀러는 진지하게 묻는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자기만의 대답을 건넨다. 퓨리오사는 디멘투스가 누운 땅에 뿌리내린 나무에서 난 과일을 따서 여인들에게 준다. 이것은 말 그대로, 복수를 토양 삼아 생명을 꽃피우는 일이다. 퓨리오사는 희망의 땅에 다다르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희망을 만들어낸다.


선택. 자신이 원하는 길을 향한 선택. 그것이 마치 모래 폭풍처럼 잔혹하게 우리를 뒤덮는 자극에서 벗어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방법이라고 영화는 속삭인다. 알고 있다. 이 간단한 진리가 실은 쉽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전쟁에 나선 워보이만큼의 용맹함을 필요로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우리는, 이전보다 아주 약간 더 용감해지지 않았을까. Witness me(기억해 줘)!


원문 https://premium.sbs.co.kr/article/v_SWw-OcrK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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