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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n 07. 2024

이게 최선입니까, <원더랜드>

<원더랜드> 스틸컷

김태용 감독의 신작을 무척 기대한 1인으로서 <원더랜드>는 실망스럽다.


<가족의 탄생>(2006)에서 인물들 간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선을 유려하게 따라가던 김태용은 <원더랜드>에 이르러 투박하고 단선적인 관계와 감정에 천착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 간의 관계는 납작하고 감정은 익숙하다. 시작은 흥미롭지만 결과가 따분하다. '죽은 이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AI'라는 설정을 가지고 이 정도의 감정선 밖에 다루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아래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더랜드> 스틸컷

가장 의아한 것은 영화 속 AI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의 위치를 너무 쉽게 수긍하며, 끝까지 인간만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AI는 인간과 동일하게 사고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곧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여느 인간이 그렇듯이 비열하게 생존을 모색하거나, 복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태주(박보검)를 복제해 만든 AI는 진짜 태주가 깨어났을 때, 어째서 그와 경쟁하지 않는걸까. 한국인에게 경쟁은 주입식 본능인데. 보통 맘대로 소멸시키겠다고 하면 화가 나지 않나? 나 같으면 열 받아서 태주 비밀이라도 하나 까겠다. 다른 여자를 만났다거나, 속으로 정인이 욕했다거나. AI 바이리(탕웨이)가 원더랜드에서 새로 시집가면 바이리 딸은 AI 새아빠가 생기는 걸까?


허튼 소리를 쓴 이유는 이걸 영화에 반영해 달라는 게 아니라, <원더랜드>가 영화의 설정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여러 잔가지를 애써 외면하고 안온하고 착한 서사에 머물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사실 이런 상상이 무의미할 정도로 <원더랜드>의 전개는 허술하다. 잔가지는 고사하고, 주요 갈등의 해결 과정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쁜 이미지에 주력하니 AI 광고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설정이 독특해도 제대로 밀고 나갈 의지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원더랜드>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적당히 감정교류를 하다가 아름답게 눈물 한 방을 흘리고 다시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서 상쾌하게 새 인생을 시작하는 전개를 미리 정해 두고, 나머지를 적당히 맞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훨씬 단순한 설정에 기반한 <그녀>(2014)가 얼마나 풍부한 사유를 이끌어냈는지를 떠올려 보자. <원더랜드>가 지금의 모습이 된 데는 이유가 있겠지만, 이 정도에 관객이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나이브한 판단이다. 하지만 <가족의 탄생>(2006) 등 전작을 고려하면 김태용은 분명 이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아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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