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탄생>(2006)에서 인물들 간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선을 유려하게 따라가던 김태용은 <원더랜드>에 이르러 투박하고 단선적인 관계와 감정에 천착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 간의 관계는 납작하고 감정은 익숙하다. 시작은 흥미롭지만 결과가 따분하다. '죽은 이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AI'라는 설정을 가지고 이 정도의 감정선 밖에 다루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아래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더랜드> 스틸컷
가장 의아한 것은영화 속 AI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의 위치를 너무 쉽게 수긍하며, 끝까지 인간만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AI는 인간과 동일하게 사고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곧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여느 인간이 그렇듯이 비열하게생존을 모색하거나, 복수를 꿈꿀 수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태주(박보검)를 복제해 만든 AI는 진짜 태주가 깨어났을 때, 어째서 그와 경쟁하지 않는걸까. 한국인에게 경쟁은 주입식 본능인데. 보통 맘대로 소멸시키겠다고 하면 화가 나지 않나? 나 같으면 열 받아서 태주 비밀이라도 하나 까겠다. 다른 여자를 만났다거나, 속으로 정인이 욕했다거나. AI 바이리(탕웨이)가 원더랜드에서 새로 시집가면바이리 딸은 AI 새아빠가 생기는 걸까?
허튼 소리를 쓴 이유는 이걸 영화에 반영해 달라는 게 아니라, <원더랜드>가 영화의 설정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여러 잔가지를 애써 외면하고 안온하고 착한 서사에 머물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사실 이런 상상이 무의미할 정도로 <원더랜드>의 전개는 허술하다. 잔가지는 고사하고, 주요 갈등의 해결 과정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쁜 이미지에 주력하니 AI 광고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설정이 독특해도 제대로 밀고 나갈 의지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원더랜드>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적당히 감정교류를 하다가 아름답게 눈물 한 방을 흘리고 다시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서 상쾌하게 새 인생을 시작하는 전개를 미리 정해 두고, 나머지를 적당히 맞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훨씬 단순한 설정에 기반한 <그녀>(2014)가 얼마나 풍부한 사유를 이끌어냈는지를 떠올려 보자. <원더랜드>가 지금의 모습이 된 데는 이유가 있겠지만, 이 정도에 관객이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나이브한 판단이다. 하지만 <가족의 탄생>(2006) 등 전작을 고려하면 김태용은 분명 이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아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