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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n 02. 2024

2배속 하면 같은 영화가 아니다

누구보다 2배속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비판의 의도로 쓴 글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2배속 자체가 나쁜가도 의문이고(2배속 기능이 불가능하다면 아예 안 볼 만한 작품도 많고), 가속 기능이 발달해 클릭 한 번에 원하는 속도를 얻을 수 있는 지금 X2배속을 향한 욕망을 누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속도'는 영화의 일부라는 것.


사람으로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은 말이 매우 느리고, 그 옆의 사람은 매우 빠르다. 이 두 가지 차이는 그들을 향한 우리의 인상을 좌우한다. 앞의 사람은 느긋하고, 여유롭고, 가끔 답답하고, 때로 의뭉스러워 보인다. 뒤의 사람은 발랄하고, 약간 가볍고, 가끔 조급하고, 때로 상대를 몰아세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때 말의 속도는 단순히 '시간'에 머물지 않고, 그 사람을 향 우리의 느낌을 결정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2배속 장면을 보며 한적함, 느긋함을 느낄 수 있을까? 지나가는 바람조차 촐싹대는 장면에서. 반대로 0.5배속 한 장면을 보며 경쾌한 속도감을 느낄 수 있을까? 아무리 내가 속도를 감안하고 본다 해도 말이다.


어떤 속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영화가 나온다. 카메라가 움직이는 속도, 대화를 주고받는 리듬, 눈빛이 머무르는 시간. 이런 것들이 장면의 성격을 결정짓는다. 그 장면이 풍기는 느낌을 형성하고, 그 영화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조각한다. 그래서 속도가 다르면, 다른 영화다.


영화는 공부와 다르다. 공부는 집중하면 빠른 시간에 휘몰아치듯이 끝낼 수 있다. 요약본만 봐도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영화는 연출가가 설정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장면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변형하면, 질적으로 다른 것이 튀어나온다. 결국 우리는 감독이 처음 의도한 영화는 볼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절대로 2배속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사용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이 많아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가공해서 감상한 작품은 역시나 원래의 것과 무척이나 다르다는 점을 느끼는 요즘이다. 마치 원작과 리메이크 작품처럼. 어떤 영화들은 대사 보다 느낌이 더 중요하고, 그건 속도를 바꾸는 순간 깨지니까. 그러니까 좋은 영화를 보는 일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시간과 인내심을 요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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