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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Oct 08. 2024

<흑백요리사>가 보여준 '공정성'에 대한 열망

※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스포일링이 있습니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예고편 캡처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콘텐츠는 누가 뭐래도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다.


이 유쾌한 프로그램은 '넷플릭스'의 무시무시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넷플릭스가 이제는 단순한 OTT가 아니라 국민 프로를 생산하는 매체가 되어버렸다는 점. <오징어 게임> 같은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넘어, 예능에서도 실력을 입증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흑백요리사>의 인기는 예능의 선두주자가 방송국에서 OTT로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증상이다. 


예능 공장으로서 넷플릭스의 흥미로운 점은 '유명인 죄다 모아놓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더 인플루언서>에서도 이런 방식을 차용됐다. 이것은 아직 연출 스타일은 없지만, 자본은 넘쳐나는 매체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선택이다. 


게다가 요즘은 SNS가 워낙 발달해 끌어모을 유명인을 찾기도 쉽다. 하지만 <흑백요리사>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나듯이, 넷플릭스는 아직 한 자리에 모은 대가들을 최대치로 활용하는 데 서툰 것 같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관련 영상 캡처


또 한 가지 <흑백요리사>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프로가 '공정성'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선호, 추구미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열망 말이다. 


가령 이 프로의 인기를 폭발시켰던 분기점은 '눈을 가린 심사'였다. 심사위원이 검은 안대를 쓴 채로 어떤 정보도 받지 않고 오직 맛을 보아 승패를 결정하는 방식. 물론 심사위원의 성향, 대진운 등을 고려해 이조차 완전히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투표 조작, 악마의 편집 등에 몸살난 시청자들에게, 이 정도로 엄밀하게 공정성을 추구하는 모습은 새로웠다. 


그렇다면 한국의 시청자들은 어째서 이 정도로 공정성에 열광할까? 이 프로의 흑/백 팀이 상징하듯이,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정이 하나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런데 그것은 평화롭고 원론적인 논의가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신계급도 안에서 완전히 공정한 경기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괴로운 낙담과 탄식에 가까웠다. 


그리고 예능은 얄궂을 정도로 사회의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최근 한국의 서바이벌 프로가 시작부터 참가자의 계급을 나누는 사례는 흔하다. <더 인플루언서>도 팔로워 수에 따라 몸값을 다르게 매긴 채 시작된다. 시청자도 이런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익숙한 일이므로. 


"그래도 심사는 공정해야지. 서바이벌을 빙자해서 특정인을 밀어주고, 나머지 사람을 병풍 세워서는 안 되잖아."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 시청자의 '공정에 대한 마지노선'으로 보인다. "시작이 불공평한 건 알겠어. 그런데 적어도 노력의 결과는 객관적으로 매겨야지." 같은 생각.

<흑백요리사>가 성공한 이유는 캐릭터 강한 유명인을 섭외한 것뿐 아니라, 불공평과 공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을 서바이벌의 규칙으로 잘 체화했기 때문이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예고편 캡처


그런데 마지노선이란 '한계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자면, 이 선을 넘는 순간 시청자의 분노가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넷플릭스는 어이없게도 너무도 허무하게 이 선을 넘으며 공들여 쌓은 성을 무너뜨린다.


4라운드 '레스토랑 미션' 때 이런 점이 두드러졌다. 많은 시청자가 지적하듯이 각 팀에서 방출된 이들이 뭉쳐 만들어진 팀은 시간과 인력의 차원에서 다른 팀에 비해 많이 불리했다. 물론 그들은 각 팀의 전술을 알고 있고, 이것이 핸디캡을 상쇄할 정도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방출되어 상당한 핸디캡을 안고 경기를 재개하는 참가자의 모습이 썩 공정하게 보이지 않았으며, 따돌림, 자본의 차이로 인한 실패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일순간 상기시켰다는 점이다.  


이 프로의 취지는 '공정한 룰 위에서 계급전을 펼쳐 흙/백 수저의 능력을 골고루 보여주겠다'는 것일 테다. 그런데 당초 취지와 다르게, 프로그램의 룰로 인해 불공정(혹은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이 새로 생성됐다. 진정 공정성 논란 없는 서바이벌은 불가능한 것일까?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미공개 영상 캡처

<흑백요리사>를 통해 느껴지는 것은 이제 판타지의 영역으로 가버린 '공정성'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는 완벽히 공정한 게임을 원하면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리고 사회의 공기를 놀이로 치환하는 예능은 그 틈을 정확하게 파고든다. 공정해서 좋아하고, 공정치 못해서 분노하는. <흑백요리사>를 둘러싼 모습이 지금 한국 사회의 축소판처럼 느껴지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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